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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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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방정식

2012. 9. 5. 08:11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인생은 산수가 아닌 수학입니다

 

경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다는 요즘, 월급 받는 사람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하는 말이 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주변에 소위 ‘잘나가는’사람이 있으면 상대적 박탈감은 더해집니다. 제가 힘들 때 종종 읽는 책 중에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 박사가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이 있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어렵다. 이것은 삶의 진리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인생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 인생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인생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은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한다. 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문제만 가장 특별하다고 믿으며, 왜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는데 자신과 가족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만 이같이 고통스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불평한다.’

 

인생은 어렵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부터 인생은 쉬워지기 시작합니다. 인생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우리로 하여금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굴레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어 가기에 고통스럽습니다. 돈이 없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기에 고통스럽고, 세상살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채워나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마치 모든 문제가 주변 상황 때문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문제의 출발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승패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계속해서 스캇 펙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성장을 자극하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과 도전적인 태도를 격려해야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일부러 문제를 내주고 풀어보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혀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해산의 고통이 새 생명의 축복의 시작이듯이 고난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축복이 됩니다. 고난이 무서운 것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왔는지 해석만 되면 그 순간부터 축복으로 변합니다. 고난 중에도 내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에 마음을 두면 축복입니다. 삶이 어려운 것은 더 가지지 못한 것보다, 있던 것이 없어질 때 생기는 염려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없는 것보다는 가진 것이 항상 많았던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없는 것, 없어진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부족한 중에라도 가진 것에 감사할 때 축복이 됩니다. 때때로 우리가 풀어가기엔 어려운 3차 방정식 같이 다기오지만 문제 속에 담긴 축복을 바라보며 당당히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 쉽게 풀리는 산수가 아니라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는 복잡한 수학임을 기억하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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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2010. 9. 7. 09:4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21세기의 하루는 지난 세월의 10년간의 변화를 추월할 정도로 급변하는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전자업계이나 IT업계는 ‘무 변화’는 곧 ‘죽음’이라는 필사의 각오로 제품 계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 석학으로 ‘파우스트에 가장 근접한 유럽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자크 아탈리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을 ‘호모 노마드(Homo nomad)’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목하는 인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노마드(nomad)’는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지 않고, 불모지를 생성의 땅으로 바꾸고,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자크 아탈리는 이미 ‘21세기 사전’에서 ‘디지털 노마드’라는 신 개념어를 만들어 유목의 시대를 예견했습니다. “노마드적 삶의 양식과 문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현대인의 필연적 패러다임이자 미래 세계를 바꾸는 주된 동력”으로 설명하고 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의미로 ‘호모 노마드’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은 곧 유목민을 야만과 무지의 역사로 폄하한 정착민의 시선이 아닌, 새것을 창조했던 유목민의 시각에서 인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목민의 가장 우선하는 가치관은 정착이 아닌 ‘변화’와 ‘개척’입니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는 과밀하고 국토는 협소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여건에도 불구하고 무한경쟁시대를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창조적 변화’에 있습니다. 호모 노마드 개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분야가 전자와 IT업계입니다. 최신의 장비로 최고의 정보를 가지고 가장 빠르게 반응해야 하는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전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시대입니다. 특히 한국은 휴대전화, 노트북, PDA 등 첨단 디지털 장비의 진화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빠릅니다. 디지털 장비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해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자기술의 발전은 정신문화의 성숙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생활이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도 ‘마인드 노마드(Mind nomad)’가 필요합니다. 징기스칸은 천막에 살면서도 세계를 품는 야망을 가졌고 자신이 죽인 적장들과 적군들의 고아들을 자신의 아내로 하여금 돌보도록 하는 따스한 가슴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목민에게는 단잠을 잘 수 있는 편안한 침대보다는 광야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한 필의 말이 더 소중했고, 편안하고 안전한 지역보다는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 대한 개척자 정신이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은 보다 편하게 보다 넓은 땅에 정착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주보다는 변화를, 정착보다는 개척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보다 넓은 세상을 꿈꾸며 달리는 진취적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세계와 사회, 문화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아직 옛날 가치관으로 굳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던 전통적인 기준은 끝까지 고수하고 지켜져야 하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로워 져야 합니다. 아직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는 너무나 많고 넓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21세기 유목민의 정신을 가지고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마음껏 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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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술

2010. 8. 3. 01:2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 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추장은 궁금해하는 손자에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데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답하였습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행복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불행도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절대불행’이나 ‘절대행복’은 없습니다. 단지 그 환경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가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지금의 환경에서 만족과 감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만족을 얻기 위해 탐욕을 갖지만, 뜻밖에도 바라는 것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입니다. 탐욕은 우리의 마음을 한곳으로만 집중시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만족은 우리의 삶의 전체를 보게 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또 그것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기술은 삶의 감각을 되살리는 일입니다. 내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가정에 급한 문제는 무엇인지를 아는 감각입니다. 모든 문제가 돈이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파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센병(나병)이 무서운 것은 직접적으로 살을 썩게 만드는 병원체 때문이 아니라, 통증의 감각을 잃게 만드는 질병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는 감각체계는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에서 보호해주는 놀랍고 훌륭하고 정교한 생물학적인 시스템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어떤 고통이나 외부의 공격에서 보호받을 수 없어 결국 우리의 몸이 썩어 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민감성을 가지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로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다른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은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모든 일과 사건이 한 가지 면이 아닌,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 비록 나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전업체인 일본의 마쓰시타 전기의 마쓰시타 코노스케 회장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난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밑바닥에서 인생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나의 선생으로 여기고 열심히 배우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몸 관리에 신경을 썼기에 이렇게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을 위한 작은 노력을 기울이고 참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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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자니간 자리

2010. 7. 26. 06:4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온 세계가 기상이변으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는 찾아왔습니다. 매년 여름휴가 전에 통과 의례처럼 태풍과 장마를 경험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숨과 시련의 상처로 남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하(盛夏)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첫눈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이 더 아름답듯이, 천둥 번개 치는 한 여름의 장마가 있어 여름이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천둥 번개소리에 가슴을 조이던 어린 시절에는 먹구름으로 드리워진 하늘이 무서웠고, 흙탕물이 큰 강을 이루며 흘러가는 그 모습과 집과 가축과 흙탕물에 휩쓸려 가는 것을 안타까움으로 지켜보는 어른들의 모습 속에서 자연의 무서운 힘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죄 많은 내 가슴을 향해 불을 던지는 것 같아 이불 속에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릴 적 철없는 소년의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봅니다. 푸르고 넓기만 하던 하늘이 어느새 먹장구름으로 변하고 천둥번개 소리로 가슴을 진동시키는 자연 앞에 인간은 오만해질 수 없습니다. 천둥번개 소리가 다시금 자연의 힘과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합니다.

여름 장마는 많은 피해도 주지만 생태계를 활력 있게 만들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합니다. 봄에 파종한 곡식들이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잘 자랄 수 있는 수분을 공급해 주고, 비바람을 불어서 식물들이 물먹은 땅에 뿌리를 잘 내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바다는 태풍과 장마로 큰 물결이 일어 깊은 곳에 있는 물이 수면으로 올라오도록 순환을 시켜줍니다. 장맛비에 애써 심은 곡식이 다 뽑히고 물에 휩쓸려 갈 것 같지만 장마 뒤에 살펴보면 더욱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나운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장대비가 쏟아져야 인간도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마가 몰고 온 폭풍우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장대비가 내리고 있건마는 산의 나무와 들판의 이름모를 들꽃도 초연하게 장맛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결코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듯 온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름모를 산새는 언젠가는 그칠 장맛비를 피해 바위틈에서 몸을 뉘이고 있나 봅니다. 아마 모든 생물들이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할 소망으로 가득하게 보입니다. 한 여름 장맛비에 꽃과 나무와 새들도 자연의 가르침 속에서 삶의 인내를 배우는 듯 덤덤히 서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름에도 폭풍우가 몰아치고 장대비가 하염없이 휘몰아칩니다. 폭풍우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의 인생이건 폭우가 내리고, 그럴 때면 고통스럽고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장마를 대비하고 폭풍우를 이겨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면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면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기다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폭우를 견딜 수 없는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폭우 속에서 뿌리를 더욱 단단히 땅에 고착시켜야만 풍성한 생명을 얻듯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생을 살아가면서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만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따스한 햇살을 맞기 위해서는 혹한의 추위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살기 위해서는 뜨거운 폭염의 시간도 견뎌야 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이 순간이 더 풍성한 삶을 위한 준비요 소망을 가꾸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을 고달프게 하는 인생의 장마가 지나가면 그 만큼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태풍과 장마를 견딘 나무와 풀들이 승리의 함성을 발하기라도 하듯이 오늘따라 더욱 싱그럽고 푸르게 보입니다.

또한 이번 장마로 어려움을 당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위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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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인생

2010. 7. 26. 06: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한 커피 전문점이 있습니다. 그 가게에서는 웬만한 점심 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에스프레소, 헤이즐넛에 시럽을 추가하고 숏(Short)이냐 톨(Tall)이냐 아니면 그란데(Grande)인지 양을 선택하면 최소한 커피 한 잔의 가격이 수 천원을 웃돌게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가격이 일반 가게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훨씬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잘 팔린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품질에는 그에 상응하는 가격을 매길 수 있다는 소비자들의 생각이 프리미엄에 해당하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원료를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얻는 프리미엄 정책 때문에 이 커피판매점은 그 브랜드가 세계 100대 브랜드 안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인생에도 프리미엄 인생이 있지 않을까요? 동일한 시간과 노력을 어디에 쏟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는 평범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프리미엄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적으로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는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성공의 키워드(Key Word)는 “첫째, 습관 주도적이 되라. 둘째,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셋째,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넷째,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다섯째,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키라. 여섯째, 시너지를 활용하라. 일곱째, 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 가운데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조언에 우리를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변화는 ‘발전’과함께 ‘위기’를 동시에 가지고 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은 많고 바쁘게 살아가지만 정작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일인지 모르고 세상의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탁월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과 그것에 대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성공은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프리미엄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여 집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오래 전 이러한 인생의 고민에 대한 한 철인(哲人)의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란,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뭔가를 생각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우리가 머리에 떠오른 대로 제멋대로 하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즉 자유로운 인간이 되려면 머리에 떠오른 것이면 무엇이나 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자, 즉 지고한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인생은 한 마디로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부귀와 권세, 명예는 결코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물질의 소유나 명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가질 때 같은 인생을 살아도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높이시고 존귀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인생의 브랜드는 하나님이 보장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생애와도 비교할 수 없는 프리미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자의 삶을 감당하는 것, 하나님 때문에 일상의 모든 영역을 의미 있게 해석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인생이 바로 프리미엄 인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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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 남은 달력을 보며...

2009. 12. 10. 20:3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도 이제 며칠 지나지 않으면 전혀 새로운 달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새로운 달이 되어 한 장 씩 넘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새로운 달력으로 바꾸는 때가 되니 만감이 새롭습니다. 새 해를 기대하는 설렘과 함께 한편으로 아쉬움과 염려의 생각이 드는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듯싶습니다. 유수처럼 흘러가는 세월 앞에 힘없이 버티며 살아가는 연약한 자아상을 보는 듯하여 더욱 가슴이 저려 옴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망이 있습니다. 12달이 지나면 한 해가 바뀌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축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를 앞두고 새롭게 결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의학자 히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자신의 책 <뇌내혁명(腦內革命)>에서 모든 사건을 마이너스(-)로 생각하지 말고 플러스(+)로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즉,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유익이 되지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러스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보게 되면 뇌 속에 엔돌핀이 생성되어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고 생활에서도 많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과거에 붙잡혀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앞으로 다가 올 새로운 일들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으로 맞이하는 플러스 생각을 가집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만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24시간, 7일, 12개월, 365일……. 시간 앞에서 불공평한 사람은 없습니다. 새로운 달력의 365일을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새 달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와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출발신호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울립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제 플러스적인 그림만 그립시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캔버스에 지난 과거의 아픔을 또다시 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기억은 금방 잊히지만 아픈 기억은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아팠던 과거는 2005년도 달력과 함께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형’의 시대는 사라졌고 우리는 새로운 ‘현재형’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과거에 충실해야 하기도 하지만 현재에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과거의 슬픔에 현재의 눈물을 낭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음껏 소망하고 마음껏 기대하십시오. 미래는 기대하는 자의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자가 희망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그림그리기를 시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패배의 기억 때문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너무 불행합니다. 실패를 거울삼아서 2006년의 새하얀 면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나갑시다. 새 해가 다가오는 것이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해지는 것이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고 힘이 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달력 위에 그려질 새로운 그림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떨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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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2009. 12. 1. 20:3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철새 떼를 보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동물들의 습성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언젠가 ‘본’ 시리즈로 유명한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제임스 본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암살요원으로 훈련을 받은 주인공이 임무수행 도중 사고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서 국적도, 이름도, 자신의 직업도 기억나지 않게 되지만 암살자의 본능만은 살아있는 자신을 보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습니다. 이 와중에 자신들의 정체와 작전비밀 노출을 염려해 주인공을 제거하려는 정보기관과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주인공 사이에 쫓고 쫓기는 액션이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 3편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무언가 잊고 살아가는 듯 한 현대인의 공허감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건강한 자아관은 건강한 자기 인식에서 나옵니다.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머니 몸 안에 있는 태아라고 합니다. 좁은 곳에 쪼그리고 있어도 편안한 이유는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된 건강한 존재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에 대한 확신이 태아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심코 던져진 돌멩이처럼 의미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인생은 아무도 없듯이, 우리들은 각기 고귀한 생명을 지닌 소중한 존재들이며, 그래서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는 육체적으로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무한한 상상력과 영원을 사모하는 가슴을 지닌 존재입니다. 흘러가는 세월에 겉 사람은 나날이 늙어가지만 날마다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천진한 속사람을 가졌고, 힘든 과거를 걸어왔더라도 여전히 웃을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건강한 어제가 있었다면 또한 건강한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례자요 여행자 같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조금 궁핍하게 살더라도, 남들처럼 건강치 못한 삶을 살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엔 그것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될테니까요.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인생을 소풍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깊어가는 겨울의 문턱에서,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  소풍 온 아이들이 보물찾기를 하듯이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찾으러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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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누님'이 될 때

2009. 12. 1. 20:33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산요수(樂山樂水)’란 말은 원래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의 준말로 지혜있는 자는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예로부터 산과 계곡을 찾아 그 깊은 의미의 깨달음으로 심신을 단련했습니다. 또한 불교계의 큰 어른이 던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유명한 것도 산은 산다워야 하고 물은 물다워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의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는 책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걷고 먹고 마시며 생활하는 일상 속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중후함’과 ‘포용성’이라면, 물이 주는 교훈은 ‘유연성’과 ‘낮아짐’에 있습니다.

 

민사법정의 한 재판장이 법정에서 당사자 간 조정을 위해 소송 당사자를 '누님'이라고 부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창원지법 민사부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 소식지에 '사람은 대접받은 대로 행동한다.'란 제목의 기고문에서 수개월 전 1948년생 '아줌마' 2명이 서로 주고받은 돈이 얼마인지 다투는 소송을 조정했던 경험을 소개했습니다. 재판장은 사건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깊게 팬 격한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원고와 피고를 "여사님"으로 부르며 최상의 예우를 하다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누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누님들, 피차 이제 인생의 하산길인데 돈을 받으면 얼마나 받고 주면 얼마나 주겠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싸우십니까, 옛날에는 좋은 사이였다면서요, 조금씩 양보해 소송을 끝내고 편히들 사시지요."라며 양측에 조정을 정중히 권했습니다. 재판장이 '누님'이라고 불렀더니 두 당사자의 굳은 마음이 조금씩 풀리더니만, 결국 적절한 금액에서 조정이 성립됐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재판장의 포용력과 낮아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으로서 권위나 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승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산과 같은 포용력과 물과 같은 겸손함으로 분쟁에 휩싸인 사람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었습니다. 산은 찾아오는 산 새 한 마리도 외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입니다. 바람타고 날아오는 꽃씨 하나라도 타박하지 않고 그 자리를 내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낮은 곳이라면 아무리 큰 바위나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서 흐르는 것이 물이 가진 진리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산과 같은 포용력과 물과 같은 낮아짐과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 많고 문제 많은 어떤 ‘아줌마’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누님’의 문제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와 나의 가족의 문제라고 여기고, ‘재판장’이 아닌 ‘동생’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누님’으로 높일 때 그 곳에 ‘감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동이 결국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찬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들 중의 하나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품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잘하지만 칭찬에는 인색하고, 남을 누르고 올라가기는 잘하지만 남이 올라갈 수 있도록 스스로 굽혀 디딤돌이 되어주기에는 인색한 것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백 년을 살아도 짧은 것이 인생인데, 함께 더불어 살며 낮아지고 섬기고 나누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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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을 가꾸려면...

2009. 5. 1. 20: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년에 심은 곰달래 길 벚꽃도 만개했습니다. 여의도 윤중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봄의 전령처럼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의 처마 밑 정원에도 봄의 흔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고 없는 것처럼 보이던 생명이 하나 둘씩 생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습니다. 새 봄에 새로운 각오와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곧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생각이 머무는 정원입니다. 생각은 씨앗이 되어 마음 정원에 심겨집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때를 따라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로 사람의 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13:1-23). 길가는 밖으로 노출된 마음입니다. 지키는 자가 없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돌밭은 은혜를 잊어버린 마음입니다. 바짝 말라붙어 황폐하기 그지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가시떨기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엉켜있어서 두려움과 근심걱정으로 가득 차 복잡하기 한이 없는 곳입니다. 좋은 땅은 준비된 마음이다. 물과 거름으로 경작되어 윤기가 흐르고 떨어진 씨앗이 적당하게 묻혀서 생명의 꿈을 꾸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정원이라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좋은 정원에는 좋은 정원사가 있습니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에 관심을 가지고 그 꽃밭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사람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주고, 필요하면 물을 대고 거름을 줍니다. 비록 지금은 흙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 채워질 정원을 생각하며 정성으로 땅을 가꿉니다. 좋은 정원사는 좋은 씨앗과 상한 씨앗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꽃 피우지 못할 씨앗은 뿌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원사의 눈에 씨앗은 벌써 꽃입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씨앗입니다. 나쁜 생각은 언제나 나쁜 열매를, 좋은 생각은 언제나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내 삶의 결과는 어제 내 생각의 결과입니다. 내일의 내 삶의 모습은 오늘 내 생각의 결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훌륭한 정원사는 사랑과 희망,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많이 뿌려야 합니다.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 안에는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돌아다니는데 그것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생각을 살피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내면의 소리는 침묵할 때에만 들립니다. 헨리 나우엔은 침묵을 ‘하나님을 향한 귀 기울임’이라고 했습니다. 침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가꾸기 위해서는 내면에 물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좋은 책, 좋은 언어, 좋은 음악도 생각을 다듬어 주는 신선한 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똑같은 화초 두 개를 놓고, 한 쪽 화초에는 좋은 책을 읽어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며, 멋진 음악을 들려주었고, 다른 한 쪽에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책과 말과 음악으로 만져진 화초는 싱싱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웠지만 그렇지 않은 화초는 점점 말라죽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정원입니다. 거기서 좋은 생각이 뿌려지며, 가꿔지고, 성장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해야 할 마음의 정원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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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2009. 4. 21.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동물의 세계>를 보면 수 백 마리의 영양 떼들이 한가로이 초원에서 풀을 뜯다가 한 마리의 맹수의 공격에 그 많은 영양들이 한 걸음에 도망가는 모습을 봅니다. 비행기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 마치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것과 흡사하게 한 마리의 저항도 없이 도망갑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 마다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비록 힘은 약하지만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므로 함께 힘만 모르면 한두 마리 맹수쯤은 충분히 몰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따른 현상일 수 있지만 힘만 모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에도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철환씨의 「연탄길」에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온 가족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몇 달 병원생활을 해온 할머니가 담당의사로부터 올 겨울을 지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와서 부모님이 매일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아무도 할머니에게 담당의사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날로 쇄약해지는 자신의 병세로 떠날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씩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그해 겨울을 보내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말한 것보다 4개월을 더 사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야 가족들은 그동안 할머니 앞에서 입었던 겨울옷을 장롱에 넣으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거, 할머니가 정말 몰랐을까?” “모르셨을 거야. 몇 달 동안 마루에도 한 번 못 나오시고 누워만 계셨던 분이 뭘 아셨겠어?” 그해 겨울을 못 넘길 것이라는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드리고 싶어 온 가족은 6월 초여름에도 한 겨울옷을 입고 할머니 방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떤 날은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하고 방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손을 잡기 전에 차가운 얼음을 만지고 아직도 겨울이라 손이 시리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드렸습니다.’

 

겨울을 넘기기 힘들다는 할머니를 위해 초여름에도 한겨울인 양 온 가족이 겨울옷을 입었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옵니다. 마치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흡사하게, 겨울이 지나기 전에 죽는다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온 가족이 힘을 모아 할머니에게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가족의 사랑이 할머니의 생명을 연장시켰습니다. 죽음 앞에 약해지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가족의 사랑 울타리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할머니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도 복되지만 이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이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가족 앞에서 죽음의 사자도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나 봅니다.

 

한 마리의 맹수 앞에 도망가는 수백 마리의 영양 떼의 모습과 초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죽음과 맞서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함께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위협 앞에 그저 운명이요 팔자라고 치부하며 도망하기에 급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어둔 그림자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보다 사랑의 행위가 풍성해 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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