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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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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도 꽃은 핍니다.

2009. 3. 20.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황무지 같은 광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 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황무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라고 해서 항상 절망과 낙심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무지에도 오아시스는 있고 꽃들을 피울 수 있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요한 세바스챤 바하’ 일 것입니다. 그는 황무지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무지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바하가 레오폴드 후작과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하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습니다. 다시 결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한 사람도 아니고 열 자녀가 먼저 갔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박약아가 있었습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2월 27일에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작곡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익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인 것을 고백하며 황무지 같은 자신의 인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을 힘입어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 D. 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 N. 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봄을 맞이하는 준비의 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비바람은 물론이고 추운 겨울도 이기고 굳어진 대지도 뚫고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광야 같은 환경을 극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느끼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 같고 살 수 없는 땅 같지만 그곳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성숙하고, 아프기 때문에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고, 힘든 시간을 통과했기에 인생을 그 만큼 더 살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는 봄에는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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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도 처음처럼...

2008. 11. 27. 20:2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의미지요. 시작도 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작은 반이지만 마지막은 전부다.’는 말을 즐겨합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 하였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좋은 시작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범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렇습니다. 처음 만남의 순간도 좋아야 하지만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마지막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간에도 헤어질 때는 첫 사랑의 기억보다는 마지막 헤어질 때의 기억이 더 오래 가지요. 또한 안 좋은 기억이 더 오래 갑니다.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잘못된 기억을 좋은 기억보다 더 오래 간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도 만들어야 하지만 헤어질 때도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월 보다는 12월이 더 중요하고, 봄보다는 겨울이 더 중요하고, 청춘의 때보다 황혼의 때가 더 중요합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것은 4구체로 된 신라의 향가(鄕歌)인 ‘헌화가(獻花歌)’입니다. 신라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관을 감상하다가 절벽위에 한 송이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순정공의 부인인 수로부인이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이에 그의 종자(從者)들은,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老翁)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며 노래를 지어서 부른 것이 이 헌화가입니다. 이 노래의 제1행을 제4행에 연결하여 읽으면 내용 이해가 쉽습니다.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면, 붉은 바위 끝에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비록 소를 모는 나이든 노인이지만 젊은이들도 감당치 못할 일을 행하는 노옹의 용기가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힘없는 노인이지만 그의 정신은 젊은이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젊은 기상이 가득합니다. 청년 못지않은 당당한 노년을 살고 있습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시간은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로 내일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물이 도랑을 타고 흐르듯이 시간도 준비하고 계획하는 대로 흐릅니다. 흐르는 세월도 디자인해야 합니다. 시간도 설계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시작만 잘 준비하지 말고 마지막도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새해가 되면 저마다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마지막 또한 철저한 준비를 가지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어질 때도 만날 때처럼... 마지막도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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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사는 지혜

2008. 11. 27. 20:2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본의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20세의 주인공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별, 죽음, 그리고 사랑을 통해 고민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상실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많은 상실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입사에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남의 기쁨이 있는가하면 헤어짐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죽음, 질병, 파산..., 그래서 기쁨의 저편에는 아픔이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항상 기쁜 일만 생길 수 없고, 또한 항상 슬픈 일만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삶에도 ‘희비(喜悲)균등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보다 알찬 삶을 살기위해서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그냥 있어도 되겠지만, 불행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의 약점을 잘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도 수많은 명곡을 썼습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장님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는 오하이오 주 감옥에 갇히기까지 인생이 추락했다가 비로소 자신에게 잠재해있는 천재적인 재능을 깨닫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상표를 붙이는 가난한 기능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쓰라린 실연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삶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천천히 삶을 음미해보면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국을 만들려면 서두르지 않고 오래 끊여야 합니다. 물론 빌 게이츠는 그의 책 <생각의 속도>에서 이 시대는 속도가 경쟁력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속도는 내는 이유는 바로 ‘느림’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여유’가 없는 ‘속도’는 조급증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며 살지 마십시오. 창조자는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유명인과 같은 옷과 헤어스타일을 한다해도 내가 유명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나’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가 곧 나의 가치임을 인식하십시오. 오히려 그 ‘다름’을 즐기십시오. 획일화를 주는 규격과 틀은 과감하게 깨야합니다. 그리고 남 따라 가려고 애쓰지 말고 애써 시대를 좇지도 마십시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우리 각자는 살아갈 각각의 길이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의 근간이 ‘음양오행설’입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타락하거나 썩습니다. 변화는 새로운 감각과 용기가 결합될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변화하려면 새로운 것과 부딪치려는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삶의 변화는 외형의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성숙’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내면의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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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2008. 9. 25. 20: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여성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크기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비쌉니다. 그 비싼 화장품을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넓은(?) 얼굴에 날마다 바르는 것을 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굳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은 여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신을 가꾸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때 삶 속에서도 의욕이 일어나는 가 봅니다.


윤미라씨가 쓴 ‘그릇을 닦으며’ 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머니// 뚝배기의 속 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주세요.


사람들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모습을 가꾸기 위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며 자신의 앞모습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심지어 앞모습을 더 잘 꾸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설거지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설거지를 해 놓고 보니 그릇의 뒤가 다른 그릇의 앞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어쩌면 사람의 관계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일보다는 나의 뒤와 너의 앞이 서로 포개져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누군가가 다시 찾아오고, 네가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그래서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릇의 안은 우리 마음이요, 그릇의 뒤는 우리의 생활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의 안쪽(마음)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 뒤쪽(생활)이 더러우면, 그 그릇(사람)은 제대로 닦여졌다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릇의 뒤쪽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의 안을 닦지 않았다면, 그 그릇은 온전히 닦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릇의 안과 밖은 하나요, 사람의 마음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 존재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퍼즐처럼 저마다의 색깔과 모양으로 한껏 어우러진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릇의 안과 밖, 내 앞모습과 뒷모습, 내 마음과 생활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만족스런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외적인 것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살아 왔습니다.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우리의 뒷모습입니다. 잠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고 가릴 수 있겠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보이는 앞모습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모습도 까지도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모습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우리의 떠난 자리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릇을 닦는 마음으로 우리의 뒷모습도 앞모습처럼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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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의 30초가 30년을 바꾼다.

2008. 8. 27. 20:2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하루의 기분은 그날 아침에 무슨 말을 듣고 시작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칭찬과 반가운 인사의 말을 들었으면 하루가 즐겁고,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하루 내내 기분이 언짢은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비단 하루의 일과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도 우연히 들은 한 마디의 말에 큰 변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토마스 호빙(Thomas Hoving)이란 사람은 예술품을 감정하는 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던 사람입니다.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낙제하여 퇴학당할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어느 과목에서도 흥미를 못 느껴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학교에서 쫒겨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각과를 택하여 보기로 했습니다. 미술과목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는데도 단지 퇴학 직전의 마지막 기회를 살려보려고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첫 강의시간에 교수가 한 조각품을 들고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이것이 무슨 작품이며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술과 학생들은 각자가 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대답했는데 드디어 호빙이 대답할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술품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서는 솔직하게 생각 나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너무 매끈하여 무슨 기계 같습니다. 특정한 용도가 있어 보입니다." 이 대답이 호빙의 생애의 극적인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던 물건은 단순히 산부인과에서 사용하는 기계 중의 하나였습니다. 느껴지는 대로 대답한 것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크게 인정 받게되자 호빙은 전공을 미술로 바꾸고 후에 성공한 예술품 감정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예술품의 감정에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한번 크게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를 교육심리학에서는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라고 부릅니다.


누구든 자신의 능력이 인정되면 자기 자신도 자기를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감이 있어지게 됩니다.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격려의 말의 듣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한 학생의 고백은 부모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하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90점을 받으면 왜 100점을 못 받아 오느냐고 꾸중 듣습니다. 80점을 받으면 더 야단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결국은 자식에 대하여 인정하기에 인색하였던 그의 부모가 그 병의 원인이 된 셈입니다. 비록 자녀가 100점을 못 받았더라도 그의 노력만큼은 인정해 주었더라도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에 지금도 ‘호빙이펙트’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30초의 칭찬이 남은 30년을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면 칭찬하고 격려하기에 인색하지 맙시다. 우리 주변인의 성공과 행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비난과 비평보다는 이해와 격려가 행복한 삶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단 한 과목에서만 '양'을 받고 나머지 전 과목에 '가'를 받은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무 한 과목에만 집중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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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의 행복

2008. 8. 6. 20:1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하잘 것 없는 강아지똥이 어느 날 거름이 되어 별빛과도 같은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다시 피어나기까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는 권정생님이 쓴 <강아지똥>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어쩌면 며칠 전에 제 가슴 속에 심은 별의 씨앗이 싹 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떻게 그런 꽃을 피울 수 있니?"

  물어 놓고 얼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비를 내리시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시기 때문이야."

  민들레는 예사로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역시 그럴 거야. 나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을라고·····.'

  금방 강아지똥의 얼굴이 또 슬프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러자 민들레 싹이,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하고는 강아지똥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

  "네가 거름이 되어 줘야 한단다."

  강아지똥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예쁜 꽃을 피

  게 하는 것은 바로 너란 말이야."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려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과연 나는 별이 될 수 있구나!'

  그러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에 그만 민들레 싹을 꼬옥 껴안아 버렸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


  비는 사흘 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강아지 똥은 온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습니다. 땅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따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샛노랗게 햇빛을 받고 별처럼 반짝이었습니다.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민들레꽃은 보잘것없이 보이는 강아지똥의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께”에 의해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잘난 꽃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볼품없고 냄새나는 강아지똥에 의해 더 기름져 갑니다. 기억합시다. “세상의 쓸모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나의 존재가 이 세상을 더 기름지게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어도 내가 낮아지고 녹아져 세상에 스며들 때 새로운 아름다움이 창조된다는 것을... 우리에게도 강아지똥의 행복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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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2008. 8. 6. 09:2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세상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저마다 눈앞이 캄캄하여 그만 풀썩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이면 누구나 아무도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뇌를 안고 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기에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물이 그 종착지인 바다에 이르게 되기까지 때로는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소용돌이도 만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수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서정시인 김재진은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고 인생의 아픔을 시로 표현했던 모양입니다.


별에서는 소리가 난다

산 냄새나는 숲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바람 소리

견디기 힘든 마음 세워 밤하늘 보면

쨍그랑 소리내며 세월이 간다.


때로 아플 때는 아프다고 소리치고 나면 속이 후련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 때면 아무나 붙잡고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나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크게 소리 한 번 지르고 나면 조금은 덜 억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8월의 짙은 녹음이 지난 겨울에 앙상했던 나뭇가지를 가리듯 우리의 아픔도 세월이 잊게 합니다. 지내놓고 보면 먹구름 뒤에 항상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 그저 막막할 때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됩니다. 결국 인생살이라는 것도 고통 안에 조차 기쁨이 숨겨 있고 즐거움 가운데도 고통이 함께함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이래서 생긴 것이겠죠. 이것이 인생살이의 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닌 시련과 좌절, 고난과 역경마저도 삶의 한 단면이 되어 생의 의미를 부각시켜 주고 있다고 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할 21가지 믿음의 법칙>이란 책에서 저자는 “아픔을 당신 인생의 전환점으로 만드십시오. 미래를 창조하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고통을 변화의 도구로 삼으십시오. 고통과 절망을 소원이라는 그릇에 담으십시오. 원한 맺힌 소원을 기도로 승화시키십시오. 당신의 기도를 전능하신 주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가슴 아픈 소리가 변하여 당신의 입술에서 환희에 찬 감사의 노래가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한번 태어난 세상은 싫으나 좋으나 예외 없이 걸어가야 할 힘든 길입니다. 그렇기에 자칫하면 좌절하기 쉽고 무엇인가 탓하며 불평하기 쉬운 것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무엇하나 나아질 인생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 내린 것이 이왕 사는 인생 긍정적으로 ‘기쁘게’ 살아 보자는 생각입니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밤하늘의 별들과 푸른 하늘, 노래하는 새들과 반기는 들꽃들,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지나가는 이웃들을 바라봅시다. 심지어 발 밑의 아스팔트길 틈 사이에서 용트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풀포기에서 생명의 신비를 볼 수만 있다면 제 아무리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는 인생길에 희망의 꽃씨를 뿌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8월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푸르름을 더해가는 8월의 녹음처럼 우리의 삶에도 희망이 짙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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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만들어가는 인생

2008. 7. 14. 09:2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1800년대 중반 자기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자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명망 있는 실업가요, 은행가였습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의 상황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재물의 유혹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의 풍운아요,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불란서의 나폴레옹3세를 만나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유도하고 유럽 대륙의 권력과 부를 재편하여 그 부의 중심부에서 서고 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불란서로 여행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 황제는 이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전선으로 떠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행여나 하는 희망으로 전선을 향해 떠났다가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양 군의 즐비한 사체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참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한동안 전장에 남아 동네 사람들과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며칠 후 전쟁터를 떠나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가 한 번도 꿈꾸어 보지 못한 새로운 꿈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모든 부상당한 군인들이 인간으로 치료받고 돌봄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꿈이었습니다. 바로 이 역사의 한 정점이 앙리 뒤낭(Henry Dunant)(1828-1910)이라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앙리 뒤낭이 목격한 전쟁터 이상으로 치열한 전장은 인간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치열한 전장(?)을 종횡으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삶의 유탄에 쓰러져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토해내는 ‘부상당한 아군’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앙리 뒤낭이 꾸었던 평화에 대한 소망을 저도 가져봅니다.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히브리 백성의 한 맺힌 언어라 할 만 합니다. 평화 없이 살아온 그들의 역사의 유일한 희망은 샬롬 곧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웃을 만날 때 마다 주고받는 샬롬의 인사는 그들과 매우 유사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온 우리민족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때의 뉘앙스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샬롬(shalom)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 속에서 흔들림이 없는 안정됨 혹은 건강한 실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 사이에서 치유를 경험하고 건강을 회복한 바람직한 삶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샬롬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도자 단테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피곤에 찢긴 몸으로 수도원의 닫힌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를 찾습니까?"라는 물음에 "평화를 찾습니다."고 대답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인생의 키워드(key word)인 것입니다.


평화를 꿈꾸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비단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소유하고 있어도 마음의 평강이 없어지면 그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삶의 평화를 누릴 수 만 있다면 모든 것을 초월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자녀들의 방학과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습니다. 이번 방학과 휴가철에는 인생의 평화를 계획하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이웃과 형제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 진정한 평화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삶에 지친 심신을 다시 회복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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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가는 날처럼...

2008. 6. 12. 09:1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소풍가는 날처럼...
 

요즘 주말마다 결혼식이 참 많습니다. 신혼부부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엔 또 다른 작은 물음이 생깁니다. ‘누군 사랑하기 싫어서 헤어지고, 누군 열심히 살지 않아서 가난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인생이 원하는 대로 계획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론 삶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경우를 당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삶을 그 차제로서 잘 해석하고 이해하며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천상병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푸르른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그의 삶은 세월과 함께 시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는 그는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좌절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퍼부어대며 살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생각을 달리하여 하루하루를 “소풍가는 날”처럼 즐겁게 살았노라고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마치 떠나온 고향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안식의 자리로 돌아가는 설렘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지만 그에게는 소풍 갔다 온 소년의 해맑은 흥분만이 남아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판화가인 루오(Rouault)의 판화에 재미있는 제목의 판화가 한 점 있습니다. 그 판화의 제목은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입니다. 괴롭히고,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도끼날에도 독을 묻혀주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 올 한 해에도 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왔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좌절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론 분노와 절망을 일으켰습니다. 올 한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나날이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소풍가는 날처럼' 생각을 바꾸어 살며 살아간다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살아간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촛불문화제'와 어수선한 국내외 환경을 보노라면 맘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원망하고 비방하기 보다는 서로의 가슴으로 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아픔도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비방하고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을 찍으려 달려오는 사람들에까지 사랑의 향기를 묻혀주었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듯싶습니다. 마치 동물들이 본능에 충실하며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인간에게는 상황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뜨거운 영혼이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 속에서도 승리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삶이 힘들어 환경 속으로 끌려 가는 듯싶지만 또한 ‘소풍 가듯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가슴을 흐뭇하게 하는 것은 시위대들의 모습이 연인, 친구, 가족 단위로 소풍온듯, 축제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80년대 반정부 데모하는 모습과는 정말 '행복한' 시위대의 모습입니다. 국민들이 가진 자기 결단의 모습이 얼마나 큰 변화와 의미를 만들어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시간은 결단하는 자의 것이고 기회는 잡는 자의 것입니다. 일어나는 상황에 본능적인 반응만 하지 말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함께 즐거운 ‘소풍’을 떠나보지 않으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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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정복합시다.

2008. 5. 21. 09:1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침을 정복합시다.

 

유태인들처럼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수 천년동안 국가 없는 민족으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어렵사리 독립국가를 세웠으나 아직도 그 지역에는 화염의 흔적이 가실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전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국가에서 유태인들의 문화와 생활을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특출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의문의 해답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철저한 신앙적인 생활규범과 가정교육 그리고 투철한 민족의식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두 종류의 달력이 있는데, 우리와 같은 태양력과 자기들만 준수하는 종교력이 있습니다. 철저한 신앙 중심의 삶을 지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종교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절기를 종교력에 따라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자녀들에게 큰 신앙교육과 가정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태양력에 의하면 ‘하루’는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시작하여 태양이 지는 밤에 마치지만 유대교에 의한 ‘하루’는 해질 때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해질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밤을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밤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시작의 시간이고 새로운 활력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활기찬 하루를 위해 우선 단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해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밤은 낮의 활동을 위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새벽이 활기찬 삶의 시발점입니다. 유명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새벽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농업을 기반으로 했기에 그 일상이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낮에는 날이 더워지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나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기억이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농기구를 소에 싣고 들로 나섰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 전에 이미 농사일로 땀에 흠뻑 젓은 몸으로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새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새벽을 빼앗기고 밤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옛날 농사짓던 농사꾼의 소박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음모와 술수, 그리고 타락과 향락으로 얼룩져 가는 사회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밤을 사모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밤마다 거리를 수놓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은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흉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네온사인 아래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기쁨과 행복을 찾아 볼 수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의 삶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밤의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유태인들이 했던 것처럼 아침을 정복해야 합니다. 밤의 유혹에서 벗어나 아침 문화를 만들어 가야할 때입니다. 온 가족이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건강한 하루를 시작할 때 비로소 가정의 행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온 국민이 건강한 아침을 열어갈 때 우리의 사회는 모든 비리와 타락과 환락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활기찬 사회를 열어갈 수 있으며, 나아가 아름다운 민족성을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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