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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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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시는 목적

2024. 1. 7.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 7. 주일오전예배
본문: 민수기 11:25-29
제목: 성령을 주시는 목적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했고, 신약시대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면서 또한 잘못된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최초로 다수의 일반인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성령에 대한 가절함이 생겨나길 기대합니다.

1.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세는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다며 죽기를 구합니다(15절). 이에 70명의 장로를 세워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7절).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개인적인 유익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겨험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됩니다.

2. 하나님을 중거하기 위해.
성령을 경험한 70명의 장로에게 나타난 현상은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미래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의 뜻을 깨닫고 그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임하십니다. 단순히 성령은 어떤 능력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증거하고 드러내느 하나님의 영입니다.

3. 삶을 의미있게 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하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던 두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을 보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히려 여호수아를 야단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은 획일적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분이기에 작자의 삶과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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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Veritas, Vita

2024. 1. 7. 11: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2. 31.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복음 14:6
제목: Via, Veritas, Vita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을 단순히 성경 속의 한 구절로 머물지 않고 지금도 사회의 각 분야에 차용되고 있습니다.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삶의 방향과 자세를 확고히 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Via, Veritas, Vita.
라틴어로 Via(길), Veritas(진리), Vita(생명)는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익숙해진 용어가 되었습니다. '경유지(Via)', 대학교의 표어로(Veritas), 건강한 생활로(Vita) 폭넓게 사용되지만 정작 그 참 의미는 사라지고 단순히 시대적 필요에 따른 용어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은 역적 진리를 갈망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 영적 갈급함.
살아가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시간에 쫒겨 살아가로, 진리를 배운다고는 하지만 정작 얄팍한 '기술'하나 배워 삶의 전쟁터로 내몰리며, 삶을 말하지만 정작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현실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현대인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능력의 원천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픕니다.

3. 우리가 걸어가는 길
세상은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우리는 이미 진리를 찾아 '그 진리'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이미 찾았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어떤 아쉬움도 후회도 없이 그저 한 걸음씩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알게 하는 바로 '그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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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명, 새로운 지평이 열리다

2023. 12. 24. 12:3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2. 14.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복음 14:1-6
제목: 그 생명, 새로운 지평이 열리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대사건입니다. '그 진리'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그 생명'임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생명'은 단순히 주어진 삶을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걷는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 생명'은 인생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생명력입니다.

1. 자기 너머의 삶
1-4절에서 계속 반복하는 단어가 "너희"입니다. 죽음의 고통을 이긴 후 얻게 될 자신의 영광을 말하기보다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그 생명'은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만듭니다.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웃을 배려하는 삶이 바로 '정의'(미슈파트)입니다.

2. 인생 너머의 삶.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의 '그 생명'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고, 섬기게 하고, 소망하게 하는 '공의(쩨데크)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3. 한계 너머의 삶.
죽음을 누 앞에 둔 예수님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 생명'이 어떤 한계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한계 너머의 삶으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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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리, 가까이 있음에 놀라다

2023. 12. 17. 12:22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2. 17.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복음 14:6-7
제목: 그 진리, 가까이 있음에 놀라다.

 

 

오늘날의 사고체계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는데 이성과 인간중심의 헬레니즘과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를 근간으로 감성과 신 중심의 헤브라이즘이 그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나 독자는 모두 헤브라이즘 사고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그 진리'란 헬레니즘적인 철학이나 탐구적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는 일상적이며 경험 가능한 것이며 누구나 자기 삶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진리'라는 의미는?

1. 원어적 의미에서 '그 진리'
'진리'의 히브리어는 '에메트'입니다. 이 단어는 '진실' '신실' '진리'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에서 파생된 단어가 '아멘'입니다. '에메트'는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로서 예수님을 지칭한느 용어이기도 합니다(요1:14, 계3:14, 19:11). '에메트'는 히브리어 자음의 첫 자(A)와 중간(M), 그리고 맨 마지막(T)으로서 헬라어의 알파와 오메가 되는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2. '그 진리'인 예수님이 곧 하나님.
3년 반 동안 함께해온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 진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신분과 정체를 다시금 확인시켜 줍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되면 얽매여있는 모든 근심과 상황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이 '그 진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그 진리', 그렇게 가까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은 너무나 익숙한 분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만큼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삶으로 보이셨고, 가르치셨고,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 어떤 진리나 원리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알아가며 친밀해진다면 그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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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핑계하지 말고 걸어라

2023. 12. 10. 12:3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2. 1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4:4-6
제목 : 그 길, 핑계하지 말고 걸어라

 

 

3년 동안 함께하면서 가르친 제자들과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승천, 그리고 재림에 대해 말씀하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말씀하는 '그 길'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할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그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도마 사이에 언급되는 '그 길'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우리가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1. 예수님이 걸어오신 '그 길'.
예수님은 어떤 이유에서 제자들이 '그 길'에 대하여 안다고 하셨을까요? 이는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제자들은 '그 길'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길어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자긴이 원하고 추구하는 길을 걷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의 '그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 예수님이 걸어가실 '그 길'.
14:1-4에서 예수님은 승천과 재림으로 제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을 말씀하지만, 정작 도마는 이에 대하여 모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삶에는 관심이 많지만, 천국의 삶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앞으로 설으실 길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구원과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3. 우리가 걷는 '그 길'.
'그 길'이란 여러 갈래 길 중 오직 한 길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길'은 상태의 의미가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동적인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능히 그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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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

2023. 12. 3. 12:34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2. 03.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복음 14:6
제목: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고, 자신의 원함을 이루기 위해 초월적인 분의 도움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현실 속에서 보이는 성공이나 형통함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굳이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유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신앙의 이유와 목적을 다시금 확인해 봅시다.

1.  길.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과 방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을 누리며 살까요? 오대사회에서 '길'이란 목적지로 가는 유일한 방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걷는 인생길이 가장 의미있고 행복을 누리는 방법임을 말씀합니다.

2. 진리.
진리(Truth)는 사실(Fact)을 기초로 변하지 않는 원리나 이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항상 '사실' 너머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사실'에 연연하지 않고 더욱 차원 높은 의미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게 하여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3. 생명.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육체적으로 살아있음의 의미도 아니고 죽어서 얻는 영원한 생명도 아니라,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살아가는 상태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진리의 길을 걷는 결과물입니다. 이런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우리의 인생을 진정한 생명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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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착각

2023. 11. 26.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1. 26. 주일오전예배
본문: 누가복음 17:15-19
제목: 아홉 명의 착각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순종함으로써 치료받았지만, 그중에서 단 한명만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는 내용입니다. 고침받은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물론 그들도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이 고쳐주었다고 여기고 간증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다가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에수님은 단 한 사람에게만 믿음을 인정하셨을까요?

1. 아홉 명이 가진 착각.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격리된 나병환자들이 예수를 향해 간절히 구하고,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고침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믿음의 결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인 믿음의 행위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2. 한 사람이 가진 믿음.
같은 기적을 경험한 열 명중의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성전이나 제사장에게 가기보다는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고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그는 자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찾기보다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이 찾으시는 믿음.
예수님은 기적을 경험한 열 명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돌아온 한 사람에게서 구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음과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구원에 합당한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내 믿음에 대한 주변 상황의 반응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대한 내 믿음의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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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믿음

2023. 11. 19.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1. 19. 주일오전예배
본문: 누가복음 7:7-9
제목: 이만한 믿음

 

 

공생애 사역 초기에 아직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6, 14:31)라고 하셨지만, 이방인인 백부장을 향해서는 "이만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백부장이 가진 믿음이 칭찬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믿음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이만한 믿음"인 이유를 찾아봅시다.

1.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
예수님을 향해 "주"라고 부르며 대하는 태도가 로마의 엘리트 장교가 식민 지배하는 유대인 청년을 대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의 소뭄을 듣고'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에서 바른 지식으로 말미암은 합당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큰 믿음이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바로 '공의'입니다.

2. 이웃을 대하는 태도.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겸손하게 간구하는 것은 자기의 종의 치유를 위함입니다. 당시 종은 한낱 재물에 불과하던 시대에 종의 질병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믿음이란 '자기'를 넘어 '이웃'으로 영향력이 확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3. 큰 믿음이란?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특별한 행위를 함으로 칭찬받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전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통해 정체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경외함으로 섬기며, 자신을 넘어 이웃을 향한 특별한 사랑과 섬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자기'를 넘어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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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추수감사절

2023. 11. 12. 12:19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1. 12.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계시록 14:14-16
제목: 예수님의 추수감사절

 

 

마지막 때 구원받을 자들을 모으시는 예수님("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을 낫을 들고 추수하는 농부의 이미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고 갖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추수 때까지 사랑으로 헌신하다가 큰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추수감사절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 추수의 결실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삶의 여러 결실에 대한 감사의 날이지만, 예수님의 추수감사절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날입니다. 가라지 속에서 자라는 알곡(참고, 마13:24-30)을 구별하여 곳간에 들이고 기뻐하듯,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온 성도들로 인해 기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2. 믿음은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밭에 씨를 뿌리고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다가 나중에 결실하듯, 우리의 믿음도 여러 고난을 통과하며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추수의 때는 바로 그 믿음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믿음의 좋고 나쁨이나 주변 환경의 좋고 나쁨보다 각자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는가입니다.

3. 우리를 추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금 면류관을 쓰고 구름 위 보좌에 앉으신 왕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왕의 추수에는 일꾼들이 동원되는데 요4:38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추수꾼으로 삼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잘 보살펴 알곡 신앙으로 성장시켜 추수때에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일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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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생활

2023. 11. 5. 12:3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11. 05. 주일오전예배
본문: 빌립보서 1:27-28
제목: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황의 아버지 빌립왕이 세운 도시로서, 로마제국의 퇴역한 군인들을 이주시켜 세금을 면제시키고 시민권을 부여함으로 그들의 헌신에 보상하고 주변 이방 민족에게 로마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도시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빌리보서는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헬: '폴리튜오마이')이 어떤 모습인지를 실감 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1. '한마음으로 사서'('스테코')
'스테코'라는 말은 전쟁에서 상대방에게 밀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뒤로 물러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마음'(성령) 안에서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의미에 따른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참고, 빌4:1, 살전3:8). 로마제국의 숱한 전쟁을 경함한 교인들은 이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2. '한뜻으로 복음이 신앙을 위하여 협력'('쉰아들레오')
'쉰아들레오'는 함께 힘을 합쳐 전쟁을 치른다는 의미로 '아곤'(씨름, 시합. 참고, 빌1:30)에서 파생되어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 단 한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영적 전쟁으로 인식하고 전쟁에 경험 많은 교인들에게 혼자의 힘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하면서 신앙의 협력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두려워하지 않는다'(프튀로')
'두려워하다'는 의미보다는 '깜짝 놀라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 어디서 적군이 나타나더라도 놀라울게 없듯이, 대적하는 사람이나 일이 발생한다고 놀라지 말고 신속히 대처하라는 의미입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산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고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의미는 더 확실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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