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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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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그림자'

2017. 12. 3. 14:52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2. 03. 주일 오전예배

 

로마서 7:21-25

 

 

 

심리학에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페르소나', 내면의 가리워져 있는 나의 모습을 '쉐도우'라고 합니다. 이 두개의 자아가 때로는 갈들을 일으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이 탄식하며 고백하는 '곤고함'이란 이런 내적갈등으로 인한 것입니다. 믿음생활하는 성도들이 종종 이런 내적 곤고함'에 빠지는 원인을 분석하고 이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봅시다.

 

1. 내 안의 '나'를 인정합시다(21절).

비록 외적으로는 '건강한' 모습이지만 내면의 모습은 여전히 약하고 부족한 상태인 거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는 것과 숨기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깁니다. 마귀는 약함을 감추고 강함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성령은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저아길 바랍니다.

 

2. 내 안의 '나'를 드러냅시다(22-24절).

내 안에 있는 약한 '나'는 개선의 대상이지 문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로마교인들에게 스스럼없이 고백하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회개, 고백, 탄식 등으로 숨김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숨길려고 할 때 마귀는 더 역사합니다.

 

3. 예수님께 감사합시다(25절).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약한 내면의 '나'를 새롭게 하고, 그 '그림자'를 ㅈ울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해결의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성령으로 행합시다(롬8장).

예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성령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령으로 행함으로 1장의 탄식이 8장의 횐희의 기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롬8:31-39). 성령으로 말미암지 ㅇ낳고는 내 안의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나를 넘어뜨리는 것은 바로 내 안의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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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열심히 배우게한다

2017. 11. 26. 13:27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1. 26. 주일 오전예배

 

호세아 4:6-10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알자'고 호소하였습니다(참고,호6:3).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안다' 또는 '지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그 의미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지금 '하나님을 안다'는 성경적 바른 개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안다'라는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말해주는 구절이 창4:1입니다. '동침하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안다(히:야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방식은 단순히 논리적이나 정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친히 동행하시면서 경험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참고,출33:17).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닌 삶으로 말입니다.

2.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안다' '앎' '지식'의 개념은 삶으로 살아내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렘22:15-16은 '하나님을 앎'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임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음을 말합니다(요17:3, 25-26).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는' 삶을 말씀합니다(벧후2:20-21).

3. 성경공부의 목적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많은 신앙의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하나님을 아는 삶'의 행위는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열심히 설교를 듣도록합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행위의 삶은 귀찮고 피곤하게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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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추수감사절

2017. 11. 19. 12:39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1. 19. 주일 오전예배

 

요한복음 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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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부담스럽다

2017. 11. 12. 15:13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1. 12.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15:9-11

 

 

 

성도들이 가장 받고 싶은 기도응답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도 '은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은혜의 의미를 여러가지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자격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또는 호의'입니다. 그 대표적인 은혜가 믿음과 구원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데, 은혜받았으니 열심히 봉사, 수고하는 경우와, 은혜 속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경우입니다. 참된 은혜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공짜로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해서 은혜를 '싸구려'처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1. 하나님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 은혜이고(롬5:15), 2.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은혜이며(딛3:7), 3. 받은 은혜에 대해 반드시 결산(고전3:10)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입니다(고후6:1).

 

2.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울은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을 사도로 세움받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며, 이 은혜를 따라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더 많이 수고'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해아는 삶이 은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3. 은혜받은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목적이 '하나님과 함께함'이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말씀을 배우고 연구해야 하며, 그 말씀대로 우리의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 밖에서 은혜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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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질문에 답하다

2017. 11. 5. 15:23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1. 05. 주일 오전예배

 

사도행전 4:5-12

 

 

베드로가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을 고친 사건으로 인해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는가?"는 질문에 베드로는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대답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수한 질문을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들도 문제 앞에서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합니다. 여러분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습니까?

 

1.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0절).

건강에 대하여, 재정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세상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 무언가 대단하고 놀라운 대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장의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애인의 인생문제에 답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입니다.

 

2. 세상지식으로는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11절).

이런 대답은 세상사람들에게는 식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편에 미리 예언되었고(시편 118:22), 예수님도 스스로 언급하였으며(마21:42), 베드로 자신도 후에 다시 이것을 상기시켰던(벧전2:7) 말씀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존재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가장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건축자')도 그 가치를 몰라보고 버렸던 돌이 가장 중요한('머릿돌') 존재였음을... 세상의 전문가들도 인정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3. 그래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12절).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Good News)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복잡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들의 환경의 모든 문제 속에서 해답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의 전부롷 생각했습니다(참고, 행4:29-30, 고전1:22-24). 오늘날도 복음의 능력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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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

2017. 10. 29. 13:11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0. 29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7:20-21

 

 

결실의 계절인 가을입니다. 풍성한 결실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신앙의 결실은 영원한 기쁨을 주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큽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한 경고로 '나무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도전은 무엇일까요?

 

1. 나무와 열매의 비유(15-20절).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로 비난하시면서 이들의 모습을 너무나 상식적인 '나무와 열매'로 비유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좋은 열매, 나무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통해 '열매'보다 '나무'가 중요함을 말씀합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좋은 양의 모습을 할지라도 그 자체가 나쁜 나무이기에 좋은 열매는 전혀없다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적용(21-27절).

'나무와 열매'를 말ㅆㅁ하신 후에 두가지 신앙의 실제에 적용합니다. 먼저는 '주여 주여 하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는 사람(21-23절)'과, 둘째는 '집을 짓는 사람(24-27절)'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드러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열매가 아닌 나무에 있습니다(21절, 23절, 27절). 예수님이 보시는 '나무'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21절)'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24절)'입니다.

 

3.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적인 '나무'보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열매'를 강조하다보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다보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신앙'의 열매는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쁜열매'이고 그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함이 있는 신앙'의 열매는 그 모양과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좋은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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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숫가의 아침식사

2017. 10. 22. 15:20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0. 22 주일 오전예배

 

요한복음 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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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이 주는 시대적 영성

2017. 10. 15.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0. 15 주일 오전예배

 

출애굽기 12:6-11

 

 

 

유월절의 '의미'에 관하여는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유월절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는 관심이 덜한 듯합니다. 유월절에는 모든 복장을 다 갖추고(11절) 어린양과 함께 누룩이 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8절). 무교병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간 무교병만 먹는 무죠절을 지키라고 합니다(15절).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처럼 '누룩없는 떡'을 강조할까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무엇을 교훈할까요?

 

1. 신앙의 단호함과 긴급성을 의미합니다.

'누룩없는 떡'인 무교병을 먹는 것은 효모가 발효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급히 출애굽한것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출12:39, 신16:3). 430년간 애굽에 살았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단호하고도 긴급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지체함없이 순종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2. 신앙의 순전함과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효소가 들어가 발효되어야 빵이 맛있습니다. 나물도 물에 살짝 데쳐야 쓴맛이 없고 먹기에 수월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을 맞이하는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가미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먹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맛에 맞추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아닌 순전한 말씀 그대로가 가장 좋습니다.

 

3. 신앙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맛도 없고 먹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요구한것은 애굽에 살면서 익숙해진 자기중심적인 생활습성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비록 내 입맛에 안맞고 익숙지 않아서 불편하더라도 믿음의 삶을 시적하면서는 하나님 말씀에 온전한 순종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헌신'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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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2017. 10. 8.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0. 08 주일 오전예배

 

에베소서 1:3-14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 복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릴 때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따로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환경은 비록 힘들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찬양이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5-6절).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나 '백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거룩하고 흠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져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 아닐까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2.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11-12절).

성경에서 '기업'이란 재산이나 소유를 의미합니다.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상속자' '유업'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재산을 상속받을 상속자란 의미입니다(롬8:16-17, 갈4:7, 벧전1:4). 우리는 비록 지금 가진 것은 없이도 장차 하나님의 것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3. 구원의 복음을 소유한 것입니다(13-14절).

많은 사상과 이념과 논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소유한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고' '성령의 인침'으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많이 소유하려는 이 세대에 성도들은 진정한 복인 '구원의 복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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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하나님

2017. 10. 1. 13:37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10. 01 주일 오전예배

 

시편 8:1-9

 

 

일전에 한 장관후보자의 일로 창조론과 진화론에 얽힌 해묵은 논쟁이 다시 일어났었습니다. 신앙과 과학이 서로간에 선명하게 설명될 수 없듯이 이러한 논쟁은 쉽게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창조에 관한 분명한 입장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과학'이 아니라 '창조신앙'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과학의 확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과학은 신앙을 설명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1.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론'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창조론' 또는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과학 또는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의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다.

 

2.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인 '창조'나 '진화'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성경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나 진화를 통해 주된 관심사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고백이 바로 창조의 하나님 앞에선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3. 성경해석에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침묵에 인간은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겸손함은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포함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계시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경륜에 과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의 힘을 가지고 해석하려하면 안됩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와 때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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