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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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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錯視)와 착각(錯覺)

2017. 8. 20. 14:58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8. 20 주일 오전예배

 

사사기 6:11-14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영웅들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웅'들에게 눈과 마음을 빼앗기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불행한 것은 한번 '착시'와 '착각'이 일어나면 바르게 교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 인물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1. 위대한 영웅은 없습니다.

사사기의 대표적인 인물이 기드온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많고(6:11,27), 말씀에 대한 의심과(6:17,33), 자만하기 쉽고(7:2), 우상을 만든 사람(8:27)입니다. 이런 모습은 기드온 뿐만 아니라 입다(10-11장), 삼손(13-16장) 등 다른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후에 등장하는 왕들의 면면도 별반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가 흠모할만한 영웅은 없습니다.

 

2. 영웅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처럼 연약한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12절)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용사란 의미입니다. 또한 "이 네 힘으로"(14절)는 기드온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사시대를 대변하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21:25)라는 것은 훌륭한 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영웅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3. 그래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웅을 만들려 하고, 그 영웅을 통해 위안과 자신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한 인간을 영웅처럼 사용하시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용하는 '하나님'을 보도록하기 위함입니다(참고, 히11:32, 12:1-2). 성경의 어떤 위인도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위인들을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사로잡혀 사용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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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유언

2017. 8. 13. 14:58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8. 13 주일 오전예배

 

베드로후서 3:14-18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참고, 1:13-14) 성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권며는 무엇일까요? 베드로후서는 각 장마다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장은 "너희", 2장은 "그들", 3장은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각각의 대상들을 살펴보면서 베드로의 마지막 유언의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1. "너희"(1:5,8,12절)는 누구인가?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참고, 벧전1:1-2). 여전히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거짓된 가르침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2:1, 3). 초보적인 신앙을 가졌기에 신앙적 양육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2. "그들"(2:1,3,15)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로 '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데스')와 '거진 선생'('프슈도디다스칼로스')'입니다. '프슈도'는 '거짓' '가짜'의 뜻을 가진 접두사입니다. 즉 이들은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일반성도들 틈 속에 들어가서 교묘하게 미혹하고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2장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사랑하는 자들"(3:1,8,14,17)은 누구인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신살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3:1-2). 자신들의 신앙을 거짓 선생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유언은 '너희들'이 거짓된 '그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3:18).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미혹에 이끌려 사사로이 풀지 말고(1:20),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3:16),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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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가려느냐

2017. 8. 6. 14:37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8. 06 주일 오전예배

 

요한복음 6:66-71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은 너무나 놀라우 사건이어서 4복음서에 다 기록될 정도로 사도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각인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일까요? 단순히 먹는 문제 해결일까요? 작은 헌신이 놀라운 기적을 만든다는 것일까요? 이 표적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는 세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른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봅시다.

 

1. 떠나가는 사람들(66절).

'제자'로 표현되어지는 사람들은 12제자가 아니라, 기적과 표적을 보고 열성적으로 따르는 무리들을 일컫읍니다(참고,14-15절, 24절, 28절).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수군거리며'(41절), '어렵다'고 하며(60절),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따라다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면 언제든지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2. 배신하는 사람(70-71절).

남아 있던 12제자들 중에서도 마귀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애국자요, 민족조의자요,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메시야인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는 성향의 사람입니다. 겉모습은 제자이지만 내면의 모습은 예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3. 영생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68-69절).

놀라운 표적을 경험했지만 표적 자체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헬: '레마')을 통해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예수님께 주목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이 건강하고 바른 신앙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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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으로 위장한 반역

2017. 7. 30.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7. 30 주일 오전예배

 

예레미야 4:1-4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의 요시야왕 13년(나이21세) 때부터 입니다(렘1:2).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왕은 국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에 가장 활발한 영적개혁을 이룬 왕입니다(왕하22-23장, 대하34-35장). 우상을 제거하고, 제단을 헐고, 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을 지키면서 말씀으로 돌아가는 신앙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에 대한 심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진심이 아니라 거짓'(렘3:1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문제는 없을까요?

 

1. 형식이 아닌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1절).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회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목적지(하나님)'가 중요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이 신앙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신앙과 성전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참고, 렘7:1-4).

 

2. 삶의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2절).

요시야 왕의 주도로 신앙개혁을 이루면서 잃어버린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견한 듯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삶을 요구합니다. 모든 삶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이 되길 바라고, 하나님만 드러나길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3. 마음과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3-4절).

'묵은 땅을 갈고'라는 것은 방치되었던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할례'란 이러한 회복은 행위보다 앞서 각자의 마음과 생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수동적인 행위는 언뜻보면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발적인 신앙이 아니라 강요된 신앙이기에 새명이 없습니다. 결국 강요된 열심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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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예수님 제대로 믿으세요!

2017. 7. 23. 13:29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7. 23 주일 오전예배

 

요나 4:7-11

 

 

주일학교에서도 가장 많이 소개되는 요나서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불복종하면 심판이요 순종하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내용일까요?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가장 번성했던 여로보안 2세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왕하 14:24-25).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인 호세아,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한데 비해 요나는 오히려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1. 단편적인 지식이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1:9, 2장의 회개, 4:2), 이런 지식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순종하는 이유와 핑계가 되버렸습니다. 성경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지식은 오로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으로 살게 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2. 완고한 '고집'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게 합니다.

요나는 분명한 자기 기준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를 싫어했고, 어쩔 수 없이 전도했으며, 박넝쿨을 좋아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이런 생각들을 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풍랑, 물고기, 박넝쿨을 사용하셨습니다. 잘못된 고집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3.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요나는 하기싫지만 니느웨로 가서 3일 길 사역을 하루만에 마치고, 이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가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실수는 그런 사역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비록 원수요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한낫 박넝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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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는 없다

2017. 7. 16. 15:10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7. 16 주일 오전예배

 

로마서 10:1-4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좋은 설교'를 듭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은혜롭고, 감동적이며, 유익한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좋은 설교'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설교'가 아니라 '바른 설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을 떠난 이유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1. 바른 말씀을 따른 신앙이 아닙니다(2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참고, 롬9:4-5).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계명, 전통, 유전으로 만들어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말씀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좋은 모양과 방법으로 행한 것 뿐입니다. 기준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2. 그 결과 3가지 주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2-3절)

첫 번째로 '잘못된 열심'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려는 그들의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열심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말씀에 대한 열심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결국 세 번째는 '불순종'입니다. 순종하며 열심히 산다고 자신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없게 되었습니다.

 

3. 결국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말씀'이 아니라 '바른 말씀'입니다(4-21절)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열심이 아니라 바른 '믿음의 말씀'으로 행해야 합니다(5-8절). 그리고 이러한 바른 말씀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믿는' 것입니다(9-13절). 이 또한 '바른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14-15절). 이에 대하여 듣지도 못했고, 알려주는 삶도 없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16-21절). 이미 다 말해 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 하는 말씀'만 듣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씀'만이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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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과 장어구이

2017. 7. 9. 15:18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7. 09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5:17-20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완전하게'했다는 말씀을 오해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구약성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신앙생활하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신앙생활 합시다.

 

1. 구약성경은 폐하여지지 않습니다(17-20절)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또한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가르치기에 유익합니다(딤후3:16, 롬7:12).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마침(롬10:4)'은 율법의 기능적인 의미가 예수님의 심자가 대속으로 대신함을 의미합합니다. 성경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습니다(요10:35). 그러나 일부 이단들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구약의 절기나 예법들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친히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삶의 모든 과정을 구약성경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참고, 마1:22, 마2:5-6, 15, 23, 3:2, 요19:24, 28, 36-37).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실패한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이 온전히 이룸으로서 믿는 자의 구세주가 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히 이룸으로서 믿는 자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의미를 심화학대하였습니다(21-48절)

구약의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참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문자적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폭넓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종살이에서 자유케하여 결국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사는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잘 지켰냐? 못 지켰냐?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 폭넓고 심오한 은혜의 세계를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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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인듯 믿음아닌 믿음

2017. 7. 2.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7. 02 주일 오전예배

 

 

 

사사기의 내용은 가나안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17:6, 21:25)입니다.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함께 살펴봅시다.

 

1. 내가 원하는 복을 위한 내가 만들어가는 신앙(17:1-6)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가정을 보면 '여호와의 복'을 말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복을 추구하고 있고, '예배'는 드리지만 자신들이 만든 예배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믿지만 결국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2. 성공을 위한 나만의 헌신(7-13, 18:18-20).

레위인 천년이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레위 청년의 선택은 오직 경제적인 면('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과 성공에 있습니다(참고, 18:19-20). 미가 또한 이런 청년을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는 목적은 오직 '복'받기 위함입니다(17:13).

 

3. 내게 좋은 것이면 하나님이 주신 것(18:7-10).

하나님이 나누어 준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새로운 땅을 찾아 다니던 단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좋은 땅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여겼습니다(18:10). 하나님의 뜻보다는 처한 형편과 상황 속에서 나에게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4. 내가 하면 신앙, 남이 하면 우상숭배(18:17-19, 30-31).

당시에 성막이 있었고 곳곳에 예배처소가 있었지만 미가는 자신만의 예배를 위해 우상과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 지파 사람들도 전쟁하러 가기 전에 우상과 제사장을 빼앗아 갑니다. 이것은 예호와 하나님이 어느새 '신앙'이 아니라 '우상'으로 변질 되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2017. 06. 25 주일 오전예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하나님나라 건설을 가로막는 '세상'의 방해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느헤미야의 신앙을 통해 어떻게 세상의 방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알아봅시다.

 

1. 한 손으로는 일하고,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고(17-18절).

주변의 방해를 극복하면서 성벽을 재건하는 방법은 각자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항상 싸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의 특징은 위협을 가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참고 유1:6). 그러나 이런 마귀의 계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에는 병기'의 자세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로 굳건하게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일터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2. 연합하라(19-23절).

3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증건합니다. 그런데 방해세력에 대응하는 방법도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 역할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대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헌신과 연합에 의해세워집니다(참고, 엡2:20-22). 하나님나라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고 서로의 짐을 함께 져주는 연합과 조화에 의해 세워집니다.

 

3. 내 안의 적을 이겨라(5장).

주변의 적들이 계속적인 위협을 가하지만 정작 치명적인 적은 '내부의 적'입니다. 5장에 보면 유대인들 내부의 다툼과 분열의 모습들이 해겨로딜 때 비로소 6장에 있는 대적들의 치밀한 공격을 능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밖에 있는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을 정복해야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보이는 적에만 신경쓰다보면 자칫 내부의 적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됩니다. 이겨야 할 적은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19) - '십자가'

2017. 6. 18. 15:22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6. 18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2:2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로 그것을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1. 죽음.

구약성경은 '피흘림'의 제사를 통해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에 그 죽음의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이 제물들의 죽음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참고, 마26:26). 그래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 뒤를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마 16:24). 이것은 곧 우리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2. 약속.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흘릴 피를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마26:28). 그 언약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레26:12, 렘31:33). 결국 십자가 사건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행하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3. 용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용서(속죄)'입니다. 용서란 죄가 있음에도 '덮어주시는(히: 카파르, 참고 시78:38)'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그의 보혈로 덮어서 죄가 '안보이는' 상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용서함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덮어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참고 벧전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