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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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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예레미야

2023. 9. 10.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9. 1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예레미야 1:1-3
제목 : 21세기 예레미야

 

 

목요 말씀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번 학기부터 예레미야서를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가장 암울하고 혼란한 유다의 멸망 막바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외부의 위협과 내적 갈등과 신앙적 외로움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영적 환경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해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불꽃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1. 불행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1절 상).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성읍입니다. 솔로몬과 왕위 쟁탈을 벌였던 아도니야의 편에 선 제사장 아비아달이 추방된 곳이기도 합니다(왕상2:26-27). 예레미야는 추방당하여 몰락한 제사장의 후예로서 절망과 불만에 빠지기보다는 믿음으로 헌신하여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합니다(1절 하).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이 분명한데도 '예레미야의 말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기계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먼저 예레미야 속에서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적용되어진 말씀이 선포된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는 갈등과 고뇌가 묻어있습니다.

3. 하나님께 헌신합니다(2-3절).
요시야 13년(BC 627)부터 시드기야 11년(BC 586)까지의 시기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기까지 역사상 가장 불행한 때입니다. 이런 시대적 운명 앞에 청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기적이나 이적보다는 매 맞고, 갇히고, 조롱당하는 일을 겪지만, 묵묵히 인생의 한가운데 토막을 기꺼이 내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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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탕'과 '돌마' 중 누가 더 문제일까?

2023. 9. 3.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9.03. 주일오전예배
본문: 호세아 3:1-5
제목: '돌탕'과 '돌마' 중 누가 더 문제일까?

 

 

신약성경에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눅 15장)가 있다면, 구약성경에는 가정을 버리고 도망간 방탕한 아내를 되찾아 오는 이야기기 있습니다. 이런 '돌탕'과 '돌마' 중에 누가 더 문젯거리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더 문제일지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그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사랑하고 용납하라는 메시지만 있습니다. 호세아는 사랑할 수 없는 아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1절).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함보다는 세상적인 상황이나 자기 능력을 더 의지합니다. 호세아는 자기 아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2.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2-3절).
우상숭배와 불순종함으로 타락하는 북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정성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그대로 반영되어서 음란한 아내로 인해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라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호세아는 자기감정을 극복하고('헤렘') 아내의 속전을 지불하여 '구속'함으로써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부부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갑니다(4-5절).
단순히 한 가정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고', '찾고',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총(히:토브 = 좋음, 선, 아름다움)'을 누려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이 순종하여서 한 가정이 회복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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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헤렘'

2023. 8. 27.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27. 주일오전예배
본문: 에스겔 3:17-19
제목: 그리스도인의 '헤렘'

 

 

'헤렘'의 영향력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야간의 사건(수 7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공동체가 고난 당하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공동체가 회복되는 '헤렘'은 구약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온전하 '헤렘'으로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살리는 성도가 됩시다.

1. 헤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헤렘'은 구약성경 전체에 약 80회 등장하는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 약 40회 나옵니다. 그런데 광야의 삶을 기록한 민수기에는 3회에 그칩니다. 이것은 '헤렘'이 가나안 땅에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바벨론에서도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삶을 요구하면서 하신 말씀이 또한 '헤렘'입니다.

2. 헤렘은 하나님께 순종의 고백입니다.
가나안 땅에 세워질 나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에스겔도 바벨론 역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기에, 낙심이나 불평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환경 속에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려고 '헤렘'을 말씀하셨습니다.

3. 헤렘은 구원받은 성도의 변화입니다.
결론적으로 '헤렘'은 죽이는 원리가 아니라 살리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사람'이 시작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헤렘'의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이나 예수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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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헤렘'하라

2023. 8. 20. 10:52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2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여호수아 7:10-13
제목 : 예수를 '헤렘'하라

 

 

'헤렘'(=진멸하다, 파괴하다, 바치다, 봉헌하다)은 무조건 이방인들을 죽이고 학살하라는 의미가 아님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헤렘'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아간의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헤렘'에 불순종한 아간의 탐욕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로 비화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무엇인지 배워봅시다.

1. 헤렘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해 줍니다.
'헤렘'은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참고, 수6:18, 7:1). 이 말은 헤렘이 단순히 이방인들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는 용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렘이 바르게 작동할 때는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2. 헤렘의 적용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수 6:18, 7:12은 이스라엘이 헤렘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됨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헤렘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잘 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드려지는' '헤렘'의 삶을 요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요구에 불응할 때는 실패를, 이에 응할 때는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3.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헤렘'해야만 하셨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의 복사판입니다(참고, 창3:6, 수7:21). 이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 자력으로는 진정한 '헤렘'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죄 없는 아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형벌의 장소인 아골 골짜기를 '내 백성의 소유'로 주시고(사65:10), '소망의 문'(호2:15)으로 삼아 진정한 '헤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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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받으시는 하나님

2023. 8. 16. 19:5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13. 주일오전예배
본문: 신명기 7:1-4
제목: 오해받으시는 하나님

 

 

가나인 족속을 '헤렘'(=진멸하다, 파괴하다, 바치다, 봉헌하다)하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하여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해석에 따라 이방인에게 무자비한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헤렘'의 의미를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서 그동안 오해와 편견에 치우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잔인한 분일까요?
'헤렘'은 무조건 죽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혼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7:22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도록 하신 것을 보면(참고, 삿3:1-2) '헤렘'을 이방 민족을 무조건 진멸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2. '헤렘'의 참 의미는?
'헤렘'의 의도는 우상숭배로부터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고(참고, 4절, 신20:17-18), 또한 이방인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도록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헤렘'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용도 변경'이자 '주도권'을 바꾸는 것입니다(예, 수4장의 라합, 수9-10장의 기브온 사람들, 삿1:22-26).

3. 오해받으시는 하나님.
'헤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통성을 지키며, 이방 민족에게는 기존의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요청입니다. 따라서 '헤렘'을 요구하는 것은 무자비한 살육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 민족까지 하나님 백성 삼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이해와 적용으로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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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2023. 8. 6. 12:29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8.06. 주일오전예배
본문: 예레미야 31:31-34
제목: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각자의 상황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지만, 전하려는 메시지는 한결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선포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가야 할지를 다시금 확인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33절).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달라도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지칭하면 '철저히 이기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 이웃을 구원하십시오(34절 상).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마22:39)인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구제, 자선, 섬김, 돌봄의 차원이 아니라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눅 15장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목적을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참고, 눅15:7, 10, 24).

3. 하나님과 화평 하십시오(34절 하).
'악행을 사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는 '죄를 짓지 않는다'가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화평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계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이루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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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사는 자의 고백

2023. 7. 30.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30. 주일오전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6:14-17
제목: 성령으로 사는 자의 고백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내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고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사는 삶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해 줍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에서 성령으로 사는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자세와 신앙적 고백을 알 수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삶을 삽니다(1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도 그렇게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순종의 결정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힘'(2:20, 3:1, 3:13-14, 5:24)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가 고난이나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믿는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순종'을 말합니다.

2. 새 피조물의 삶을 삽니다(15절).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을 포함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죽음'보다는 새로운 '생명'에 강조가 있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갈 4:19)으로 사는 것으로서 이릉 위해 바울은 '해산의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써 순종하는 자들을 신학이나 교리를 뛰어넘어 실존적인 구원의 삶을 살게 합니다.

3. 내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17절).
'흔적(헬: 스티그마타)'은 '낙인' '상처' '표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 유불리를 떠나 '믿음의 표시'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손해 볼 것도 없고, 후회할 일도 없으므로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흔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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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

2023. 7. 23.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23. 주일오전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4:19-20
제목: 그리스도의 형상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율법이냐 믿음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다가 율법적인 행위를 더하려는 혼합주의적 신앙 때문입니다. 이런 혼합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은 종교적 행위에서는 헌신적이고 열심일 수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복, 구원, 은혜, 문제해결, 등이 아닙니다. 이런 요소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믿음의 부산물이지 목적이 도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아닙니다.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사탄을 짓밟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믿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져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 주신 믿음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을 '십자가'의 삶으로 고백하듯이(참고, 2:20, 5:24, 6:14), 믿는 자들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처럼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자기 삶으로 소개합니다(참고, 4:12-15).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능력이나 육체적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수님의 외적 삶의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가능하게 한 성령의 내적 생명력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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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이 중요할까?

2023. 7. 16.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16. 주일오전예배
본문 : 갈라디아서 3:3
제목 : 왜 성령이 중요할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단순히 공감하거나 지적, 또는 감성적으로 동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령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실체적인 삶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령으로 시작하나 다르게 미칠 수 있다(3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의 시작을 성령의 시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개개인의 믿음의 시작부터 개입하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으로 마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령은 인격의 영이기에 떠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며, 탄식하기도 하십니다.

2. 성령은 구원으로 인도한다(참고, 갈5:5-6, 6:8).
구원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믿음을 통하여 임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곧 '의의 소망'(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갈5:5). 또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영생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하는 삶이 곧 구원과 영생의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은 믿음으로 살게 한다(참고, 갈5:16, 33-34, 25-26).
설령으로 사는 믿음은 신비주의적 영성이나 은사만을 강조하는 열성파의 모습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며(참고, 6:18-21),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참고, 6:22-23).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한 믿음의 삶을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능히 살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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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만든 나비효과

2023. 7. 9.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09. 주일오전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1:6-10
제목: '다름'이 만든 나비효과

 

 

'나비효과'란 보잘것없이 미미한 행동이 나중에 예측할 수 없이 큰 사건을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등장한 것짓 교사와 그들의 가르침은 어쩌면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참고, 2:4, 12). 그러나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8-9절). '다른 복음'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배교(6절).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중에는 율법 행위들도 여전히 중요하기에 믿음과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참고, 3:2, 5, 4:10, 5:2).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배교는 대단한 반역적 행위만이 아니라 진리에서 떠나 '비슷함'에 만족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2. 교란(7절 상).
'교란'이란 혼란과 혼동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구원의 길은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의 길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3. 변질(7절 하).
신앙의 변질은 언제나 사소한 변화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사소한 변화마저도 심각하게 인식되기보다는 오히려 유익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 이외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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