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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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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

2023. 7. 23.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23. 주일오전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4:19-20
제목: 그리스도의 형상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율법이냐 믿음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다가 율법적인 행위를 더하려는 혼합주의적 신앙 때문입니다. 이런 혼합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은 종교적 행위에서는 헌신적이고 열심일 수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복, 구원, 은혜, 문제해결, 등이 아닙니다. 이런 요소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믿음의 부산물이지 목적이 도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아닙니다.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사탄을 짓밟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믿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져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 주신 믿음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을 '십자가'의 삶으로 고백하듯이(참고, 2:20, 5:24, 6:14), 믿는 자들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처럼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자기 삶으로 소개합니다(참고, 4:12-15).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능력이나 육체적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수님의 외적 삶의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가능하게 한 성령의 내적 생명력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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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령이 중요할까?

2023. 7. 16.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16. 주일오전예배
본문 : 갈라디아서 3:3
제목 : 왜 성령이 중요할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단순히 공감하거나 지적, 또는 감성적으로 동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령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실체적인 삶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성령으로 시작하나 다르게 미칠 수 있다(3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의 시작을 성령의 시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개개인의 믿음의 시작부터 개입하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으로 마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령은 인격의 영이기에 떠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며, 탄식하기도 하십니다.

2. 성령은 구원으로 인도한다(참고, 갈5:5-6, 6:8).
구원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믿음을 통하여 임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곧 '의의 소망'(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갈5:5). 또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영생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하는 삶이 곧 구원과 영생의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은 믿음으로 살게 한다(참고, 갈5:16, 33-34, 25-26).
설령으로 사는 믿음은 신비주의적 영성이나 은사만을 강조하는 열성파의 모습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며(참고, 6:18-21),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참고, 6:22-23).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한 믿음의 삶을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능히 살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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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만든 나비효과

2023. 7. 9.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09. 주일오전예배
본문: 갈라디아서 1:6-10
제목: '다름'이 만든 나비효과

 

 

'나비효과'란 보잘것없이 미미한 행동이 나중에 예측할 수 없이 큰 사건을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등장한 것짓 교사와 그들의 가르침은 어쩌면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참고, 2:4, 12). 그러나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8-9절). '다른 복음'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배교(6절).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중에는 율법 행위들도 여전히 중요하기에 믿음과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참고, 3:2, 5, 4:10, 5:2).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배교는 대단한 반역적 행위만이 아니라 진리에서 떠나 '비슷함'에 만족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2. 교란(7절 상).
'교란'이란 혼란과 혼동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구원의 길은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의 길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3. 변질(7절 하).
신앙의 변질은 언제나 사소한 변화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사소한 변화마저도 심각하게 인식되기보다는 오히려 유익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 이외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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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인생

2023. 7. 2.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7.02.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하 4:4
제목 :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인생

 

 

므비보셋은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의 아들인데 5살 때 사고로 두 다리를 저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성장 과정이나 주변 여건은 왕가의 자제로 태어났음에도 힘들고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부끄러움을 없이하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때로는 삶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수 있음에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몰아내고 당당하게 사는 삶의 비결을 찾아봅시다.

1. 자신이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여깁니다(참고, 상하 19:30).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가문, 어린 나이에 찾아온 장애, 그리고 그의 어두운 성장 과정을 보면 누구나 안타깝고 애석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 자신은 오히려 자신에 대하여 의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재산을 자신을 모함한 종에게 전부 주라고 할 수 있는 담대함은 자신에 대한 당당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삶의 진정성이 부끄러움을 몰아냅니다(참고, 삼하 19:24).
억울한 모함으로 인해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는 다윗이 느끼는 고통을 자신의 삶 속에서도 공감하며 생활했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자기 자신은 알기에 어떤 상황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진정성이 가진 힘입니다. 삶에 진정성이 있다면 어떤 오해나 모략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3. 사람의 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머뭅니다(참고, 삼하 9:12).
다윗이 베푼 은혜도 소중하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손길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행한 상황에서도 아들의 이름을 '미가'(뜻 : 여호와와 같은 분은 누구인가?)라고 지으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어쩌다 세상의 지위는 잃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지위는 그를 통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고, 역대상 8: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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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30. 22:1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6. 30. 금요예배

본문: 대하 6:28-31

제목: 이렇게 기도합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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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은혜의 원인

2023. 6. 25.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6.2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아모스 5:18-27
제목 : 잃어버린 은혜의 원인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넗은 영토를 회복하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참고, 왕하 14:25-27).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물질적인 풍요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변해버렸고, 약 30년 뒤에는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렸음에도 왜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우리의 신앙 속에 숨어있는 신앙의 독버섯을 잘 분별해 내야 합니다.

1. 잘못된 가르침(18-20절).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족한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여 신앙에서도 막연한 낙관론이 확산되다 보니 '여호와의 날'이 마치 자신들에게 임하는 축복의 날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날인데, 자신이 의인인 줄 착각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 때문입니다.

2. 잘못된 전통(21-23절).
북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참고, 왕상 12:28-33). 잘못된 전통임에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으로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신앙 전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기때문에 끊임없이 개혁되고 개선되야 합니다.

3. 잘못된 삶(24-27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정의와 공의의 삶(24절)을 살기보다는, 과거의 열심이었던 신앙만을 기억하면서 지금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인 삶을 고발합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신앙이 지금의 신앙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자기 검증을 통해 바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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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합시다(12)

2023. 6. 23. 2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6. 23. 금요예배

본문: 대하 6:26-27

제목: 이렇게 기도합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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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8. 12:22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6.18. 주일오전예배
본문 : 마태복음 27:55-56
제목 : 제자, 사도, 장로(2)

 

 

지금까지 수 주에 걸쳐 베드로의 신앙을 중심으로 성숙해지는 믿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 사도, 장로와 같은 신앙 성숙은 특별한 믿음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내려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함을 말해 줍니다. 오늘의 성경에 등장하는 한 무리의 여인들처럼 그럴듯한 직분은 없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보면서 헌신과 도전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제자 :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고 섬깁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었습니다. 제자들과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며 예루살렘까지 왔지만 결국 십자가 앞에는 여자들만 있습니다. 이것은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의 삶이란 이 여자들처럼 자신의 목적이나 환경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2. 사도 : 순종하여 가서 말씀을 전달합니다(참고, 마28:10).
예수님 당시의 유대 문화에서 여성의 활동이나 증언은 신뢰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예쑤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들에게 가서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게 됩니다. 사도란 결과를 보장할만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듣고 배운 말씀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순종의 믿음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3. 장로 : 이름도 없이 교회를 섬깁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와 부활을 목격한 특별한 경험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된 교회 사역에서 주목할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이들의 활동이 극히 드뭅니다. 그 이유는 이름 없이 묵묵히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장로는 직분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의미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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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6. 22:1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 06. 16. 금요예배

본문: 대하 6:24-25

제목: 이렇게 기도합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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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1. 12:3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6.1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디도서 1:5-9
제목 : 이런 장로가 됩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장로'란 장로교회의 조직적 당회의 회원으로서 다스리고 치리하는 직분입니다. 이런 개념은 성경적이기보다는 교리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장로'는 한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며 양육하는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장로의 자격은 세상적인 능력이나 실력과는 다른 차원의 자질을 요구받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의 자격을 살펴봅시다.

1. 신앙 인격.
오늘 본문과 함께 디모데전서 3:1-7에서도 장로(감독)의 자격에 관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후보자의 능력이나 실력에 관한 것보다는 신앙으로 말미암는 삶의 모습, 즉 신앙 인격적인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고난 성품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의 모습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더 큼을 의미합니다.

2. 신앙 관계.
장로는 자기의 신앙 성장에 주력하기보다는 다른 성도를 양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과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이런 관계성을 가정(6절: '한 아내의 남편'), 교회(7절: '청지기'), 사회(8절: '나그네를 대접')에서 확인하도록 합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신앙 진리.
9절에서 장로는 본인이 먼저 바른 말씀을 잘 배워야 하고, 배운 말씀을 잘 지켜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로는 권위적인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는데 솔선수범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양육하는 장로는 입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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