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5. 주일오전예배
본문: 로마서 13:1-7
제목: 하나님의 골든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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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1:31-32
제목: 과거를 넘어 미래로
'므낫세'(잊음)와 '에브라임'(번성)을 통해 요셉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결론은 '아픈 과거는 잊고 번성하는 미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을 축복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모든 상처는 하나님 안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흔적을 남기기보다는 미래의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에 대한 실질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계승 모습입니다.
1. 아브라함을 장자일까 막내일까?
가난안을 향해 가던 데라는 하란에 머물러 살다 205세에 죽고(32절), 아브라함은 다시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을 떄가 75세였고(창12:4), 이때 데라가 죽은 해였다면(참고, 행7:4) 데라가 130세 일 때 태어났습니다. 이는 장자가 아니라 막내였음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인데, 출생 순서(장자권, 금수저(?))가 축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2. 장자권이 역전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요셉과 르우벤, 등 아브라함 이후의 후손들도 보면, 태생적인 장자권이 복된 인생을 보장해 주기보다는, 약하고 부족한 자기 능력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미래를 개척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 복을 누립니다. 약함이 믿음과 결합할 때 곧 능력이 됨을 확인해줍니다.
3. 과거보다는 미래를 위한 헌신이 중요.
태생적으로 주어진 복도 큰 은혜이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구호나 지적 동의가 아니라, 과거나 현재에 머물지 않고 복된 미래를 의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입니다. 2025년에는 아픈 과거나 소망없는 현실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믿음으로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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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상처는 시간 속에서 잊히기도 하지만, 상처의 기억은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남아 삶의 순간순간에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거나, 때로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상처'는 치유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기억'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가는 불행을 겪었지만, 총리가 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요셉을 통해 아픈 기억의 성경적인 치유에 대해 알아봅시다.
1. 억압된 기억의 해방.
첫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잊었다)라고 지은 것을 보면 요셉은 기전까지는 아픈 기억 속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픈 기억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의도적인 망각보다는 하나님의 치유를 위한 기억의 활성화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주 '기억하라',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은 기억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니라 치유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를 통한 기억의 재해석.
회개는 '죄로부터 용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인정하고 삶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 회개의 참된 의미입니다. 요셉은 45:4-8에서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아픈상처'를 수용하고, 해석하고, 상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회개'의 과정을 통해 아파하는 자신과 아픔을 준 타인의 영혼육도 함께 치유합니다.
3. 아픈 기억의 치유 결과.
요셉이 둘째 아들 이름을 '에브라임'(번성하다)로 지은 것은 아픈 기억 치유를 통해 고통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감사와 소망으로 살게 됐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기억의 치유만이 목적이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 회복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도 죽기전에 두 손자를 축복할 때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아파세워 축복하셨습니다(창48:1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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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노벨문학상을 한국의 한강 작가가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그의 소설 3권을 구해 읽으면서 우리 민족이 역사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어떤 방법으로 극복해 왔는지를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삶의 상처들을 치유하기보다는 그 상처를 안고, 품고, 가슴에 새기고, 흐르는 세월에 맡기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상처도 부끄러운 것도 숨길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희망을 줄 수 있음을 말합니다.
1. 상처 인정하기.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상처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처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피해자'임을 드러내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갚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누리듯이, 상처는 외면하거나 부정할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기회를 제공합니다.
2. 의미찾기.
로마의 사형도구였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 것처럼 상처에 깃든 '의미'를 발견하면 상처도 '상징'이 됩니다. 상징은 자신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상처들을 치유할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의 '육'과 '혼'이 상처로 인해 아파할 때, 우리 '영'이 하나님 영과 만나 하나님이 주시는 통찰력과 깨달음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3. 품어주기.
품는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처 입은 자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환대(Hospitality)'라고 합니다. 선한 사라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상처 입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품고 섬길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셨음을 기억합시다.-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는 예수님은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신랄한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왕의 아들 결혼식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명망시키고, 길에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청하여 식장을 가득 메우게 한 왕을 통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예복 입지 않은 자.
결혼식에 초대받았지만, 이런전런 핑계로 참석지 않은 사람들 대신, 길로 나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초청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합당한 예복을 입고 왔지만 단 한사람은 예외였습니다. 이에 노한 왕은 그를 저주합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복은 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순복의 표시입니다.
2. 청함받은 자.
결혼식장을 둘러보면서 "청함받은(헬: '클레토스'=Calling)자는 많다"라고 하는 왕의 마음은 초대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참석지 않고, 또 일부는 왕의 종들을 죽이면서까지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착찹함을 토로합니다. 많은 사람을 청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하나님 마음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3. 택함받은 자.
택함받은(헬: '에클레토스'=Choosing)자란 초청에 기꺼이 합당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왕은 예복을 입고 참석한 무리 중에서 진정으로 결혼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사람을 찾지만, 그 수가 적다고 탄식합니다. 천국은 초대받기만 하면 가는 곳이 아니라, 초대에 합당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동반해야 합니다(참고, 벧후1:10-11, 계17:14).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오순절), 수장절(초막절)에는 반드시 성전에 가서 제사해야 했습니다(참고, 출23:14-17). 전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갖은 어려움과 시렴을 예상하면서도 예루살렘까지 길고도 먼 순례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정을 향한 순례길을 걸으면서 부른 노래가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에 감사하며 그 길을 걸었을까요?
1. 환경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1-2절).
1절과 2절에 나오는 "도움"(히: '에쩨르')은 '도움의 내용'보다는 '도움을 주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성령을 '보혜사'(히: '에쩨르')로 표현하듯이, 어려움을 해결할 특정한 도움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고백입니다. 그래서 "나의 도움은 어디에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가 바로 나의 도움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2. 가진 물질이 아닌 가진 믿음에 대한 감사(3-7절).
하나님 자체가 '도움'임을 고백한 후, 하나님이 항상 지켜주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어떻게 감사했을까요? 환경적 평안이나 부요를 감사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순례할 믿음을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3. 조건적 감사가 아닌 영원한 감사(8절),
"너의 출입"이란 순례의 시작과 끝을 말합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순례길이지만 가는 길과 오는 길뿐만 아니라, 영원한 본향인 천국까지 가는 길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상황에 따른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신뢰를 기초하는 감사가 절실한 시기입니다.
지난주에 나눈 누가복음 14:15-24의 잔치 비유와 마찬가지로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는 말을 전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전도의 관점이라면 왜 잔치에 참여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쫒겨나야 합니까? 본문의 비유는 전도에 관한 내용도 아니고, 누가복음 14장의 잔치 비유와도 전혀 다른 의미와 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의 아들 혼인 잔치에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실까요?
1. 어떤 상황에서 행하신 비유인가?
21장부터 24장까지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신랄한 논쟁과 책망을 하는 상황인데, 이런 첨예한 영적 전쟁의 상황에서 행한 비유가 단순히 '전도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에 대한 강한 책망이 아닐까요?
2. 어떤 성격의 혼인 잔치인가?
고대 세계 질서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정복하고 그 충성 조건으로 정략결혼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현상을 비유하는데, 전쟁에 승리한 왕이 이런 결혼을 요구하면 정복당한 나라 입장에서는 무조건 혼인예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왕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다면 왕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3. 쫒겨난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얼떨결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히려 환영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예복을 입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해해 주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왕이 분노한 이유는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과 무례함으로 여겼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진멸하는 것도 목격했음에도 왕에 대한 두려움과 예의 없음에 분노한 것입니다.
안식일 예식을 마친 후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행한 '잔치의 비유'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말씀의 의도를 바르게 때닫지 못하고 편리한 대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신앙의 위험한 학각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1. 본문 이해의 착각.
일반적으로 잔치 비유에 나오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23절)는 말씀만을 특별히 강조하여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교회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말씀을 교묘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다 일치하여 사양한' 바리새인들의 변질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표현입니다.
2. 구원에 대한 착각.
식사에 참석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복되다'라고 했을 때(15절)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통해 '너희는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야'(참고, 24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상관없이 자기만의 열심이나 만족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 나의 신앙에 대한 착각.
자기만족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이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이 빠진 율법의 함정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품격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로써 내면의 인격이 겉으로 들어나는 행동의 가치를 말합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향을 싼 종이에는 향내가 난다'라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신앙의 품격을 함께 살펴보면서 각자의 내면과 일상의 삶을 되돌아보고 아름다운 품격을 위한 결단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자기 부인.
가장 먼저 언급하신 부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란 죄성을 가진 '자아'를 말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옛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롬 6:6). 욕망, 탐욕, 시기, 교만, 등으로 표출되는 자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 된 '자아'를 비워낸 상태가 '겸손'이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2. 자기 십자가.
예수님이 말씀하는 십자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속과 구권의 십자가가 아니라 당시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율법적인 저주의 상징이나 로마제국의 사형 도구로 쓰이는 십자가입니다. 즉, 죄인이나 반역자란 낙인, 부끄러움, 수치, 손해... 등, 자신의 상황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오롯이 감수하면서 즐거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말씀합니다.
3. 예수를 따름('Come after Me')
호감에 이끌려 '따르는'것(헬: '아코루오마이' = come after me)합니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나(마4:19), 요한이 예수님을 지칭할 때나(요:1:27), 예수님이 제자를 지칭할 때(눅14:27)의 '따름'은 단순히 삶의 방식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사상까지도 온전히 수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