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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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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08

  1. 2024.08.04 동지의 조건
  2. 2024.07.28 친구입니까 동지입니까
  3. 2024.07.21 다시 시작하는 믿음 1
  4. 2024.07.14 숨은 보물찾기
  5. 2024.07.07 내가 얻은 하나님의 의
  6. 2024.06.30 홈쇼핑과 EBS
  7. 2024.06.16 그리스도인의 성육신
  8. 2024.06.09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9. 2024.06.02 21세기 잠언
  10. 2024.05.26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동지의 조건

2024. 8. 4.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8. 4.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일 1:1-4
제목: 동지의 조건

 

 

지난주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친구'의 관계가 인간적인 정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신념과 목표로 하나가 된 '동지'의 의미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믿음의 동지가 되는 기본적인 조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는 모든 사람을 동지로써 '사귐'(헬: '코이노니아'=교제, 친교)을 요청하고 있는데, 단순히 사람 간의 친교만이 아니라 '생명', '더불어', '기쁨'으로 사귀는 영적인 관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생명(1-2절).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 '영생'은 죽어서 얻는 구원의 삶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됩니다(참고, 3:15, 5:11, 20). 믿음의 동지로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육체로 나타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이 예수의 삶과 뜻을 이 땅에서 세워가는 삶을 목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더불어(3절, 헬: '메타'=함께, 안에)
사람 간의 교제가 강조되면 친목회가 되고,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가 강조되면 수도원이 됩니다. 믿음의 동지는 성도 간의 친교와 교제도 중요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 머물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기도, 말씀 등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적 속성을 바르게 배워서 그 하나님의 성품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사귐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3. 기쁨(4절).
이 기쁨은 단순히 환경이 주는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함께 거함으로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의 동지로 산다는 것이 상황이 호전됨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더 악화될 수도 있지만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으로 거룩한 사귐을 유지하고 있는 동지임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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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입니까 동지입니까

2024. 7. 28. 12:15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7. 28.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 15:12-15
제목: 친구입니까 동지입니까

 

 

욥기에서 욥과 세친구 간의 논쟁을 통해 서로의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욥의 친구들과 반드시 비교해 봐야 할 대상이 바로 다니엘의 친구들입니다. 욥의 '친구'를 표현할 깨는 "레아"(친구, 형제, 이웃 등, 일반적으로 가까운 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 비해 다니엘의 '친구'는 "하바르"(연합, 결합, 연결)라는 단어로서, 이 의미를 담은 단어가 바로 '동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친구일까요? 아니면 동지일까요?

1. 친구와 동지.
갑자기 닥쳐온 고난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욥의 친구들은 위로와 권면으로 현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 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친구들은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인간적인 위로보다는 공동 목표인 신앙수호에 마음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우상숭배에는 목숨을 내놓습니다.

2. 예수님의 친구.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친구'는 우정 관계가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쳐 투쟁하는 '동지'의 의미입니다. 심지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은 욥과 같이 고난(죽음)의 문제를 앞에 두고 인간적인 위로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다니엘과 친구들처럼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뜨거운 동지애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3.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로 표현할 때나(참고, 약2:23, 출33:11),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말씀하는 친구라는 표현은 '우정'이 아니라 '동지'의 의미인데, 이는 다니엘과 친구들처럼 영적 전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실 상황인식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입니까? 동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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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믿음

2024. 7. 21.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7. 21.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42:7-10
제목: 다시 시작하는 믿음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경험이나 전통, 교리, 지식 등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님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가르치려 한 것에 대한 책망과 함께 용서와 회복의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상고해 봅시다.

1. 번제.
하나님이 준비하라고 한 번제물의 양은 개인이 드리기에는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이 정도의 양은 다른 성경에 비추어보면 한 나라의 왕이 드리는 분량입니다(참고, 대상15:25, 대하29:21, 겔45:23). 이것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무게일 것입니다. 바른 지식 없이 남을 가르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알고 이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욥에게 가서...
성막이나 성전이 없는 시대에는 적당한 곳에서 제사드리면 될 터인데 굳이 욥에게 가라고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인 욥에게 가서 자신들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받고 함께 예배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걔와 상처잆은 자의 치유를 통한 관계 회복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듭니다.

3. 욥의 기도.
욥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 친구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중보자 또는 제사장적 기도로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화회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 친구뿐만 아니라, 욥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 받는 것을 보면(참고, 10절), 중보자 또는 제사장적 기능이 얼마나 의미있는 사역인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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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보물찾기

2024. 7. 14. 12:22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7. 14.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28:1-11
제목: 숨은 보물찾기

 

 

욥기 28장은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전후의 문맥이나 전체적인 흐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28장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깨달은 후의 욥의 고백이요 찬양으로 이해합니다. 즉, 자신의 의가 전부인 양 살아온 욥이 믿음의 참 의미를 다시금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해 지혜를 사모하고, 추구하고, 그것을 얻는 과정을 마치 땅 속에 숨겨진 보화를 찾는 광부 모습으로 비유하며 묘사하고 있습니다.

1. 탐지(1-8절).
깊은 땅 속에 있는 보물을 찾으려고 갱도를 깊이 뚫으며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려고 애쓰고 수고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어디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기에(참고, 20-23절) 하나님께 그 길가 장소를 알려고 간절히 매달리고, 지혜를 얻으려고 땀 흘리는 헌신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2. 발견(9-10절).
보화가 숨겨진 곳을 발견했다면 '산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서 각종 보화를 찾아내는 광부처럼, 지혜를 찾으려 단단한 바위도 깨뜨리고, 여러가지 방해물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앞을 가로막는 단단한 바위는 우리의 자아나 고집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굳어진 심성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3. 채굴(11절).
드디어 깊은 곳에 있던 보화를 밖으로 가지고 나오듯이, 하나님의 지혜를 찾고 보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체였습니다(참고, 28절).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보화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인데, '경외'하는 하나님입니다. 과연 이란 '경외'가 자신의 믿음 속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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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얻은 하나님의 의

2024. 7. 7.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07. 07.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33:23-28
제목: 내가 얻은 하나님의 의

 

 

엘리후는 욥이 가진 '도덕적 의'의 개념(참고, 9-12절)과 '하나님의 의'의 개념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욥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말하면서 욥의 경우와 같이 도덕적 행위를 통해 만들려고 하는 '나의 의'의 무익함을 지적합니다.

1. 거저 얻은 하나님의 의(23-25절).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는 중보하는 천사가 질병 중에 있는 사람의 정당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당함을 질병 중에 있는 사람에게 전했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한 "대속물"은 하나님의 정당함에 대한 반응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죽, 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정당함을 '믿는' 것에 관한 결과이지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2. 친밀함의 회복(26절).
대속물인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질병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환경의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히:쩨데크)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을 상징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믿음과 함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3. 내가 부르는 노래(27-28절).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데 두 가지 주제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옳음'을 모르고 '자기의 옳음'을 고집하며 살아온 삶에 대한 회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결국, 회복의 주체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관련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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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과 EBS

2024. 6. 30.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06. 30.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42:5
제목: 홈쇼핑과 EBS

 

 

욥기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다 보니 1장과 42장만 보고 '의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 정도로 이해하거나 믿음으로 고난을 인내하면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이 임한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주장과 견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 대해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EBS입니다.

1. 욥기의 다양성
욥기의 시대적 배경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족장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적, 문화적 한계가 있고, 등장인물들이 다양하고, 논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자의 이해가 비슷하기도 하고 상반되기도 하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2. 욥기의 주제.
욥의 신앙은 하나님도 인정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주었을까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욥을 사탄과 장난삼아(?) 고통에 빠트리는 이상한 하나님일까요?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욥이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는 전제 때문입니다. 욥에게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교육하려는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3. 하나님의 EBS.
욥은 42장의 결론 부분에서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주를 본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고난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해답이며, 논쟁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고, 이 땅을 향하던 시야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욥기는 인생의 각가지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는 EBS임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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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육신

2024. 6. 16. 12:24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6. 16. 주일오전예배
본문: 누가복음 7:34-35
제목: 그리스도인의 성육신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신학 용어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뜻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신학적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며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되어주는 실제적 삶까지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님의 성육신적 삶이 투영되고 반영되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실천해 나갈지 함께 상고해 봅시다.

1. '와서'
성육신적 삶의 첫 단계는 나와 '다름'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보다는 '다름을 초월'하여 함께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들은 백부장, 과부의 죽은 아들, 바리새인과 죄지은 여자입니다. 이들은 당시 율법으로는 금기시되는 부류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거리끼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2. '먹고 마시매'
당시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비친 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그렇게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렸을까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육신적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신자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우너하기 위합입니다.

3.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성육신적 삶에서 가장 위험 요소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의나 자긍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육신적 삶의 의미는 행위의 주체인 자신이 아니라 행위의 대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행위에 대한 자기 의로 만족하기보다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영적인 변화에서 성육신적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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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2024. 6. 9. 12:16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6. 9. 주일오전예배
본문: 요한복음 21:5
제목: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초대교회에서 물고기('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첫머리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여서 신앙인의 표시로 여겨져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익투스'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때 물고기의 이미지를 아주 특별하게 하용하고 있습니다. 고기잡이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 조반을 준비해 주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 함께 상고해 봅시다.

1. 익투스와 옵사리온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물고기는 '익투스'로 표기하는(참고, 6, 8, 11절) 반면, 소금에 절이거나 요리된 상태의 물고기는 '옵사리온'으로 표시합니다(참고, 9, 10, 13절). 사도 요한은 이런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제자들이 잡은 153마리의 '익투스'와 예수님이 친히 준비해 주신 떡과 '옵사리온'의 차이를 상기시키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음식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 물으신 것은 밤새도록 고기잡이한 결과로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잡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프로스파기온'으로서 '먹을 음식'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말입니다. 이에 제자들의 대답은 '없습니다'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3. 익투스는 옵사리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잡은 생선('옵사리온')을 좀 가져오라'(10절)고 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옵사리온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잡은 '익투스'가 아니라 예수님이 준비한 떡과 '옵사리온'으로 조반을 먹어야 했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듯이(참고, 눅5:11), 진정한 양식은 예수님께 있기에 예수를 따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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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잠언

2024. 6. 2. 12:17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6. 2. 주일오전예배
본문 : 잠언 9:13-18
제목 : 21세기 잠언

 

 

잠언은 삶의 여정 속에서 느끼고 경험한 신앙의 지혜를 모은 책입니다. 율법이나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짧은 삶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과 권면을 줍니다. '미련한 여인'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신앙의 지혜에 귀 기울여 봅시다.

1. 한 번 은혜로 지옥 간다(13절).
13절의 '어리석다'(히:페타유트)의 원어적 의미는 '순진함' '단순함'입니다. 그런데 어리석다고 번역되는 이유는 '하나' 또는 '한가지'만 알기 때문입니다. 책 한 권만 읽고 떠드는 사람이 위험하고, 한번 은혜받은 것을 전부인듯 여기는 사람이 위험합니다.

2. 높이가 아닌 깊이로 승부하라(14-16절).
미련한 여인은 '높은 곳'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미혹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높은 곳'을 좋아하고 선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높은 곳이 아닌 깊은 곳에 있습니다. 깊은 곳에 생명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17절).
도둑질하고 몰래 먹는 음식은 '썩은 음식'입니다. '썩은 음식'을 먹는 이유는 그런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썩은 고기에는 절대 입을 대지 않듯이, 썩음 음식을 안 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사자가 되길 애써야 합니다.

4.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꿔라(18절).
미련한 여인이 앉은 곳이 높고 편안해 보이지만 죽음의 그늘진 곳임을 모르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혹에 빠져 끌려갑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충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곳이 불편하여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꿀 수 있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2024. 5. 26. 12:24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5. 26. 주일오전예배
본문: 다니엘 1:3-7
제목: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어린 다니엘에게 바벨론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생활하다가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이역만리 타국까지 끌려간 시대의 희생자인 다니엘은 원망, 불평이나 신앙적 방황보다는 바벨론에서 적극적으로 적응하여 4명의 왕을 섬기면서 시대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바벨론이라고 불리는 '이 세대'로 끌려온 '시대의 희생자'처럼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처럼 '시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확신.
믿음의 확신이란 단순희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입니다. 비록 환경은 나아지지 않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신뢰로 인해, 그가 끌려간 이후(BC 605년, 1차 포로)로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2차, 3차 포로) 믿음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 믿음의 겸손.
겸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존중과 섬김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외적 모습이 섬김인데, 약자로서 강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진 능력이 있음에도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낮은 자세로 죄인들을 섬긴 것처럼, 바벨론에서의 생활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주변 사람을 복음으로 섬기는 삶입니다.

3. 믿음의 지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이 지혜로서 바벨론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열심히 적응하며 생활하다가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소홀히 여기다가 영적 정체성을 잃고 맙니다. 바벨론 문화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원동력이 바로 영적 지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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