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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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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2009. 4. 21.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동물의 세계>를 보면 수 백 마리의 영양 떼들이 한가로이 초원에서 풀을 뜯다가 한 마리의 맹수의 공격에 그 많은 영양들이 한 걸음에 도망가는 모습을 봅니다. 비행기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 마치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것과 흡사하게 한 마리의 저항도 없이 도망갑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 마다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비록 힘은 약하지만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므로 함께 힘만 모르면 한두 마리 맹수쯤은 충분히 몰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따른 현상일 수 있지만 힘만 모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에도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철환씨의 「연탄길」에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온 가족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몇 달 병원생활을 해온 할머니가 담당의사로부터 올 겨울을 지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와서 부모님이 매일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아무도 할머니에게 담당의사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날로 쇄약해지는 자신의 병세로 떠날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씩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그해 겨울을 보내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말한 것보다 4개월을 더 사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야 가족들은 그동안 할머니 앞에서 입었던 겨울옷을 장롱에 넣으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거, 할머니가 정말 몰랐을까?” “모르셨을 거야. 몇 달 동안 마루에도 한 번 못 나오시고 누워만 계셨던 분이 뭘 아셨겠어?” 그해 겨울을 못 넘길 것이라는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드리고 싶어 온 가족은 6월 초여름에도 한 겨울옷을 입고 할머니 방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떤 날은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하고 방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손을 잡기 전에 차가운 얼음을 만지고 아직도 겨울이라 손이 시리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드렸습니다.’

 

겨울을 넘기기 힘들다는 할머니를 위해 초여름에도 한겨울인 양 온 가족이 겨울옷을 입었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옵니다. 마치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흡사하게, 겨울이 지나기 전에 죽는다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온 가족이 힘을 모아 할머니에게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가족의 사랑이 할머니의 생명을 연장시켰습니다. 죽음 앞에 약해지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가족의 사랑 울타리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할머니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도 복되지만 이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이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가족 앞에서 죽음의 사자도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나 봅니다.

 

한 마리의 맹수 앞에 도망가는 수백 마리의 영양 떼의 모습과 초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죽음과 맞서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함께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위협 앞에 그저 운명이요 팔자라고 치부하며 도망하기에 급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어둔 그림자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보다 사랑의 행위가 풍성해 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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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도 꽃은 핍니다.

2009. 3. 20.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황무지 같은 광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 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황무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라고 해서 항상 절망과 낙심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무지에도 오아시스는 있고 꽃들을 피울 수 있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요한 세바스챤 바하’ 일 것입니다. 그는 황무지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무지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바하가 레오폴드 후작과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하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습니다. 다시 결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한 사람도 아니고 열 자녀가 먼저 갔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박약아가 있었습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2월 27일에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작곡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익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인 것을 고백하며 황무지 같은 자신의 인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을 힘입어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 D. 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 N. 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봄을 맞이하는 준비의 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비바람은 물론이고 추운 겨울도 이기고 굳어진 대지도 뚫고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광야 같은 환경을 극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느끼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 같고 살 수 없는 땅 같지만 그곳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성숙하고, 아프기 때문에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고, 힘든 시간을 통과했기에 인생을 그 만큼 더 살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는 봄에는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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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박종렬선교사님의 1월 선교 소식!!

2009. 2. 14. 01: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월 선교 소식을 전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올해도 일월이 이렇게 다 지나갔습니다.

 

선교센타 공사를 하느라 현장에서 계속 지내면서 조금이라도 공사비를 절약하려 자재를 사는 것에서부터 작업지시까지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지냈습니다.

이제 지붕공사도 다 끝나고 천장 공사와 변소와 부엌을 만드는 일등을 하고 있습니다.

부엌은 로스마리 학교처럼 한국 부뚜막으로 만들어 연료를 절약하면서도 우갈리를 잘 요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부엌으로는 많은 양의 우갈리를 만들지 못해 주일마다 식사가 모자라 계속 늘어나는 교인들에게 미안하였는데 부엌이 완성되는 대로 제대로 식사를 대접하려합니다.

오전에 주일학교를 마치고 어린이들은 식사를 먼저 하게 되는데 어른 예배를 마친 후에도 다시 와서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요즘 워낙 집에서 먹을 것이 없어 어느 곳에서든지 먹을 것이 있으면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힘을 다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케냐에서도 양식 값이 많이 올라 서민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로스마리 학교와 마사이 학교들에 공급하는 점심급식이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배가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인수가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9월부터 같이 사역을 하고 있는 Mbugua 목사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청소년들과 장년들의 수가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은 주일학교와 장년수가 비슷하게 늘어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어린이 150명 장년 150명 정도 출석하였는데 금년 목표를 어린이 장년 각각 250명으로 잡았는데 너무 적게 잡은 것을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주부터는 매주 수요일을 전도하는 날로 정하여 저도 같이 나가 부지런히 전도를 하려고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봉급인상을 요구하며 두주를 수업을 중단하여 학생들이 수업을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내일부터 수업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두주동안 학교에서 점심급식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동안 Dominic 목사는 정부기관에 제출할 서류 등을 정리하면서 저의 일을 도와주었고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어 기도하였는데 이번에 임신이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이시키리아와 올로이카 두 마을에도 사역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이시키리아의 고장 난 펌프가 수리되어 가뭄이 심한 요즘에도 물이 잘 나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방문하였는데 가뭄으로 양식이 없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올로이카에 솔라펌프를 설치하였더니 아무 문제없이 잘 사용하고 있어 역시 투자를 많이 하면 편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선교센타 공사가 끝나면 마이시키리아 교실 두칸과 올로이카 학교 바닥 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고등학교 학생을 후원하는 사역이 점점 중요한 사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46명이 되었는데 앞으로 100명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신석교회와 성석교회가 중심이 되어 도저히 상급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못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의 손길을 펴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달 19일에 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3월에 아내의 검진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수술후 이번이 세 번째인데 좋은 결과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줄 믿습니다.

 

늘 기도와 물질로 섬겨주시는 김목사님들의 귀한 섬김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연락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2009년 2월 1일

 



케냐에서 박종렬선교사 드림
254 738 171 626
p.o.box 824 Village Market Nairobi 00621 Kenya
http//: kenyaro.org/

마지막도 처음처럼...

2008. 11. 27. 20:2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의미지요. 시작도 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작은 반이지만 마지막은 전부다.’는 말을 즐겨합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 하였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좋은 시작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범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렇습니다. 처음 만남의 순간도 좋아야 하지만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마지막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간에도 헤어질 때는 첫 사랑의 기억보다는 마지막 헤어질 때의 기억이 더 오래 가지요. 또한 안 좋은 기억이 더 오래 갑니다.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잘못된 기억을 좋은 기억보다 더 오래 간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도 만들어야 하지만 헤어질 때도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월 보다는 12월이 더 중요하고, 봄보다는 겨울이 더 중요하고, 청춘의 때보다 황혼의 때가 더 중요합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것은 4구체로 된 신라의 향가(鄕歌)인 ‘헌화가(獻花歌)’입니다. 신라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관을 감상하다가 절벽위에 한 송이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순정공의 부인인 수로부인이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이에 그의 종자(從者)들은,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老翁)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며 노래를 지어서 부른 것이 이 헌화가입니다. 이 노래의 제1행을 제4행에 연결하여 읽으면 내용 이해가 쉽습니다.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면, 붉은 바위 끝에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비록 소를 모는 나이든 노인이지만 젊은이들도 감당치 못할 일을 행하는 노옹의 용기가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힘없는 노인이지만 그의 정신은 젊은이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젊은 기상이 가득합니다. 청년 못지않은 당당한 노년을 살고 있습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시간은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로 내일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물이 도랑을 타고 흐르듯이 시간도 준비하고 계획하는 대로 흐릅니다. 흐르는 세월도 디자인해야 합니다. 시간도 설계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시작만 잘 준비하지 말고 마지막도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새해가 되면 저마다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마지막 또한 철저한 준비를 가지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어질 때도 만날 때처럼... 마지막도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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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사는 지혜

2008. 11. 27. 20:2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본의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20세의 주인공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별, 죽음, 그리고 사랑을 통해 고민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상실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많은 상실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입사에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남의 기쁨이 있는가하면 헤어짐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죽음, 질병, 파산..., 그래서 기쁨의 저편에는 아픔이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항상 기쁜 일만 생길 수 없고, 또한 항상 슬픈 일만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삶에도 ‘희비(喜悲)균등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보다 알찬 삶을 살기위해서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그냥 있어도 되겠지만, 불행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의 약점을 잘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도 수많은 명곡을 썼습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장님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는 오하이오 주 감옥에 갇히기까지 인생이 추락했다가 비로소 자신에게 잠재해있는 천재적인 재능을 깨닫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상표를 붙이는 가난한 기능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쓰라린 실연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삶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천천히 삶을 음미해보면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국을 만들려면 서두르지 않고 오래 끊여야 합니다. 물론 빌 게이츠는 그의 책 <생각의 속도>에서 이 시대는 속도가 경쟁력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속도는 내는 이유는 바로 ‘느림’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여유’가 없는 ‘속도’는 조급증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며 살지 마십시오. 창조자는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유명인과 같은 옷과 헤어스타일을 한다해도 내가 유명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나’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가 곧 나의 가치임을 인식하십시오. 오히려 그 ‘다름’을 즐기십시오. 획일화를 주는 규격과 틀은 과감하게 깨야합니다. 그리고 남 따라 가려고 애쓰지 말고 애써 시대를 좇지도 마십시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우리 각자는 살아갈 각각의 길이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의 근간이 ‘음양오행설’입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타락하거나 썩습니다. 변화는 새로운 감각과 용기가 결합될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변화하려면 새로운 것과 부딪치려는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삶의 변화는 외형의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성숙’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내면의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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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2008. 9. 25. 20: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여성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크기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비쌉니다. 그 비싼 화장품을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넓은(?) 얼굴에 날마다 바르는 것을 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굳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은 여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신을 가꾸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때 삶 속에서도 의욕이 일어나는 가 봅니다.


윤미라씨가 쓴 ‘그릇을 닦으며’ 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머니// 뚝배기의 속 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주세요.


사람들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모습을 가꾸기 위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며 자신의 앞모습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심지어 앞모습을 더 잘 꾸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설거지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설거지를 해 놓고 보니 그릇의 뒤가 다른 그릇의 앞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어쩌면 사람의 관계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일보다는 나의 뒤와 너의 앞이 서로 포개져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누군가가 다시 찾아오고, 네가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그래서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릇의 안은 우리 마음이요, 그릇의 뒤는 우리의 생활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의 안쪽(마음)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 뒤쪽(생활)이 더러우면, 그 그릇(사람)은 제대로 닦여졌다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릇의 뒤쪽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의 안을 닦지 않았다면, 그 그릇은 온전히 닦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릇의 안과 밖은 하나요, 사람의 마음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 존재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퍼즐처럼 저마다의 색깔과 모양으로 한껏 어우러진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릇의 안과 밖, 내 앞모습과 뒷모습, 내 마음과 생활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만족스런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외적인 것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살아 왔습니다.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우리의 뒷모습입니다. 잠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고 가릴 수 있겠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보이는 앞모습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모습도 까지도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모습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우리의 떠난 자리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릇을 닦는 마음으로 우리의 뒷모습도 앞모습처럼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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