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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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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33

  1. 2024.11.17 씁쓸한 결혼식 1
  2. 2024.11.10 순례자의 감사
  3. 2024.11.03 살벌한 결혼식
  4. 2024.10.27 위험한 착각
  5. 2024.10.20 그리스도인의 품격
  6. 2024.10.13 하나님의 안타까움 1
  7. 2024.10.06 믿음과 성경 2
  8. 2024.09.29 믿음의 사람 2
  9. 2024.09.22 나쁜 놈, 착한 놈, 믿는 놈 1
  10. 2024.09.15 평안과 희망이 있습니까?

씁쓸한 결혼식

2024. 11. 17.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1. 17. 주일오전예배
본문: 마태복음 22:11-14
제목: 씁쓸한 결혼식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는 예수님은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신랄한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왕의 아들 결혼식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명망시키고, 길에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청하여 식장을 가득 메우게 한 왕을 통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예복 입지 않은 자.
결혼식에 초대받았지만, 이런전런 핑계로 참석지 않은 사람들 대신, 길로 나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초청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합당한 예복을 입고 왔지만 단 한사람은 예외였습니다. 이에 노한 왕은 그를 저주합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복은 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순복의 표시입니다.

2. 청함받은 자.
결혼식장을 둘러보면서 "청함받은(헬: '클레토스'=Calling)자는 많다"라고 하는 왕의 마음은 초대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참석지 않고, 또 일부는 왕의 종들을 죽이면서까지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착찹함을 토로합니다. 많은 사람을 청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하나님 마음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3. 택함받은 자.
택함받은(헬: '에클레토스'=Choosing)자란 초청에 기꺼이 합당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왕은 예복을 입고 참석한 무리 중에서 진정으로 결혼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사람을 찾지만, 그 수가 적다고 탄식합니다. 천국은 초대받기만 하면 가는 곳이 아니라, 초대에 합당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동반해야 합니다(참고, 벧후1:10-11, 계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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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감사

2024. 11. 10. 12:24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1. 10. 주일오전예배
본문: 시편 121:1-8
제목: 순례자의 감사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오순절), 수장절(초막절)에는 반드시 성전에 가서 제사해야 했습니다(참고, 출23:14-17). 전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갖은 어려움과 시렴을 예상하면서도 예루살렘까지 길고도 먼 순례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정을 향한 순례길을 걸으면서 부른 노래가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에 감사하며 그 길을 걸었을까요?

1. 환경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1-2절).
1절과 2절에 나오는 "도움"(히: '에쩨르')은 '도움의 내용'보다는 '도움을 주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성령을 '보혜사'(히: '에쩨르')로 표현하듯이, 어려움을 해결할 특정한 도움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고백입니다. 그래서 "나의 도움은 어디에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가 바로 나의 도움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2. 가진 물질이 아닌 가진 믿음에 대한 감사(3-7절).
하나님 자체가 '도움'임을 고백한 후, 하나님이 항상 지켜주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어떻게 감사했을까요? 환경적 평안이나 부요를 감사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순례할 믿음을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3. 조건적 감사가 아닌 영원한 감사(8절),
"너의 출입"이란 순례의 시작과 끝을 말합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순례길이지만 가는 길과 오는 길뿐만 아니라, 영원한 본향인 천국까지 가는 길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상황에 따른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신뢰를 기초하는 감사가 절실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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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결혼식

2024. 11. 3.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1. 3. 주일오전예배
본문: 마태복음 22:8-14
제목: 살벌한 결혼식

 

 

지난주에 나눈 누가복음 14:15-24의 잔치 비유와 마찬가지로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는 말을 전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전도의 관점이라면 왜 잔치에 참여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쫒겨나야 합니까? 본문의 비유는 전도에 관한 내용도 아니고, 누가복음 14장의 잔치 비유와도 전혀 다른 의미와 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의 아들 혼인 잔치에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실까요?

1. 어떤 상황에서 행하신 비유인가?
21장부터 24장까지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신랄한 논쟁과 책망을 하는 상황인데, 이런 첨예한 영적 전쟁의 상황에서 행한 비유가 단순히 '전도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에 대한 강한 책망이 아닐까요?

2. 어떤 성격의 혼인 잔치인가?
고대 세계 질서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정복하고 그 충성 조건으로 정략결혼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현상을 비유하는데, 전쟁에 승리한 왕이 이런 결혼을 요구하면 정복당한 나라 입장에서는 무조건 혼인예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왕의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다면 왕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3. 쫒겨난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얼떨결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히려 환영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예복을 입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해해 주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왕이 분노한 이유는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과 무례함으로 여겼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진멸하는 것도 목격했음에도 왕에 대한 두려움과 예의 없음에 분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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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착각

2024. 10. 27. 12:18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0. 27. 주일오전예배
본문: 누가복음 14:21-24
제목: 위험한 착각

 

 

안식일 예식을 마친 후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행한 '잔치의 비유'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말씀의 의도를 바르게 때닫지 못하고 편리한 대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신앙의 위험한 학각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1. 본문 이해의 착각.
일반적으로 잔치 비유에 나오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23절)는 말씀만을 특별히 강조하여 전도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교회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말씀을 교묘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다 일치하여 사양한' 바리새인들의 변질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표현입니다.

2. 구원에 대한 착각.
식사에 참석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복되다'라고 했을 때(15절)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통해 '너희는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야'(참고, 24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상관없이 자기만의 열심이나 만족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 나의 신앙에 대한 착각.
자기만족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이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이 빠진 율법의 함정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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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품격

2024. 10. 20. 1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0. 20. 주일오전예배
본문: 누가복음 9:23
제목: 그리스도인의 품격

 

 

품격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로써 내면의 인격이 겉으로 들어나는 행동의 가치를 말합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향을 싼 종이에는 향내가 난다'라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신앙의 품격을 함께 살펴보면서 각자의 내면과 일상의 삶을 되돌아보고 아름다운 품격을 위한 결단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자기 부인.
가장 먼저 언급하신 부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란 죄성을 가진 '자아'를 말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옛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롬 6:6). 욕망, 탐욕, 시기, 교만, 등으로 표출되는 자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 된 '자아'를 비워낸 상태가 '겸손'이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2. 자기 십자가.
예수님이 말씀하는 십자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속과 구권의 십자가가 아니라 당시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율법적인 저주의 상징이나 로마제국의 사형 도구로 쓰이는 십자가입니다. 즉, 죄인이나 반역자란 낙인, 부끄러움, 수치, 손해... 등, 자신의 상황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오롯이 감수하면서 즐거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말씀합니다.

3. 예수를 따름('Come after Me')
호감에 이끌려 '따르는'것(헬: '아코루오마이' = come after me)합니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나(마4:19), 요한이 예수님을 지칭할 때나(요:1:27), 예수님이 제자를 지칭할 때(눅14:27)의 '따름'은 단순히 삶의 방식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사상까지도 온전히 수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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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안타까움

2024. 10. 13.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0. 13. 주일오전예배
본문: 마가복음 1:14-15
제목: 하나님의 안타까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경을 통해 신앙의 회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신앙에서는 율법주의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행하신 첫 설교 속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인강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613개의 항목을 율법으로 규정해 놓고 이를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보다는 교회생활이 신앙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회개.
일반적으로 '회개'하면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뉘우치고 용서을 구하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문자적 의미는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메타'=~로부터 + '노에오'=마음, 생각).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정작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관심 없음을 지적합니다.

3. 복음.
예수님은 복음에 대한 설명 없이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유앙겔리온 = 좋은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지도자들이 정해놓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임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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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성경

2024. 10. 6.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10. 6. 주일오전예배
본문: 느헤미야 8:8-21
제목: 믿음과 성경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귀하게 쓰임 받은 '착한 사람'의 전형이라면,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는 '믿는 사람'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에스라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모습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생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낭독하고" = 성경을 읽어라.
성경시대는 개인이 성경을 읽는 환경이 아니라 듣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을 입체적으로 읽고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성경을 정기적으로 또는 많이 읽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읽는 못적은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2. "해석하여" = 뜻을 이해하라.
당시 사람들은 일상에서 아람어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다 보니 히브리어로 씌여진 성경을 이해할 수 없자 통역자들이 통역하고 그 뜻을 해석해 줍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사사로운 지식으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모든 이단사상은 잘못된 성경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3. "다 깨닫게 하니" = 적용하고 실천하라.
말씀을 해석하고 깨달은 후의 결과는 '울고'(9절), '간절히 사모하고'(13절), '순종'(14절)하는 결실로 나타납니다. 단순히 성경적 이해나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 조항을 준수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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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2024. 9. 29. 12:24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9. 29. 주일오전예배
본문: 에스라 7:6-10
제목: 믿음의 사람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귀하게 쓰임 받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고레스는 유대인들을 귀환시켜 성전을 재건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모든 일이 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 재건 후 약 60년 뒤, 에스라는 소수의 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하나님은 왜 에스라를 등장시켰을까요? 예스라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1.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
'율법(히: 토라)'은 모세 오경을 의미합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의 목적은 율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온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믿고 연구하는 사람이 곧 믿음의 사람입니다.

2.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
'준행'이라는 말은 그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학문적으로나 지식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항상 '하나님의 손길'(7:28, 8:18, 22, 31)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율법적 행위의 삶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언약>(참고, 삼하7:12-16)을 믿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자 점점 세속과 타협하게 됩니다(참고, 9장, 10장). 이에 에스라는 성전이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희망임을(10:2-4) 가르치며 믿음의 삶의 회복과 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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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착한 놈, 믿는 놈

2024. 9. 22.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09. 22. 주일오전예배
본문: 이사야 45:1-7
제목: 나쁜 놈, 착한 놈, 믿는 놈

 

 

나쁜 짓 안 한고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 것 아닌가? 굳이 교회 다니면서 신앙 생활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른 생활'의 가치를 아는 유교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사고에서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문에 해답을 주는 인물이 바벨론을 정복하고 포로로 잡혀 온 유다 백성들을 귀환시켜 성전에 재건하도록 한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입니다.

1. 니쁜 놈.
성경에서 "나쁜 사람"이란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정하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지만(참고, 4, 5절), 성경에는 고레스에 대한 언급이 이방 사람으로는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역대하,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더 등). 비록 본인은 인식 못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세밀하게 개입합니다.

2. 착한 놈.
고레스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그의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목자'(사 44:28), '기름부음 받은'(1절)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믿는 놈.
모든 사람이 고레스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나 방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알려주는 전도가 중요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종의 삶을 산다면 너무 좋지만,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고 산다면 얼마나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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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과 희망이 있습니까?

2024. 9. 15. 1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4. 9. 15. 주일오전예배
본문: 예레미야 29:11-14
제목: 평안과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이 29장 4절부터 23절에 담겨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며 그 땅에 정착하고 살면 70년 후에 귀환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미래와 희망>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포로로 타국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희망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미래와 희망은 무엇일까요?

1.  70년 뒤의 귀환이 평안과 희망일까?
포로들에게 귀환은 가장 간절한 희망일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에스라서와 에스더서를 보면 귀환하지 않고 제국 곳곳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의 삶이 폐허로 변해버린 예루살렘의 삶보다 더 안정과 평안을 주었던 것 입니다. 70년 뒤에나 있게 될 예루살렘 귀환이 그들에게 평안과 희망은 아닙니다.

2. 무너진 성전을 제건하는 것일까?
바벨론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포기하고 귀환한 사람들이 각가지 어려움을 무릎쓰고 성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들의 삶은 안정되기보다는 전쟁과 핍박, 결국은 성전이 우상과 돼지의 피로 더럽혀지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세계 강대국의 지배하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삶이 평안과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3. 하나님 자신이 평안과 희망입니다.
성전, 제사, 율법, 등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결국은 하나님을 찾고 섬기고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12~14절에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평안과 희망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 속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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