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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우는 에클레시아

2023. 2. 19.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2.19.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16:1-5
제목 : 우리가 세우는 에클레시아

 

 

로마서 16장은 바울의 서신중에서 아주 특별한 인사말로 마칩니다. 약 26명이나 되는 성도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서로 문안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단순한 인사나 안부의 차원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교회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오늘의 교회가 본받아야 할 본질이 담겨있습니다.

1. 사역에 예외가 없는 교회(1절).
16장에 등장하는 26명의 사람 중에서 9명이 여성, 11명이 노예들입니다.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도 다양한 사람들이 차별 없이 사역에 동참하는 모습은 교회만이 가지는 특별함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위해 헌신함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였습니다.

2. 합당한 예절이 있는 교회(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성경에 6번 언급되는데, 4번은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낮은 상황에서 이례적이지만, 신앙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볼 때 신앙적인 지위가 자연스럽게 인정받는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삶의 현장 속에 세워진 교회(5절).
가정 교회 형태로 시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성전에서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타 종교와는 달리, 일반인이 자신의 가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통한 예배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은 교회의 터전입니다.

4. 연합과 조화를 이루는 교회.
다양한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받은 은혜와 은사를 통하여 조화를 이루며 연합하여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희생과 섬김이 있었고, 손해와 피해를 감수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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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이 막혔을 때

2023. 2. 12.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2.12.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15:22-29
제목 : 가는 길이 막혔을 때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계속해서 무산되는 것에 큰 아쉬움을 표합니다(참고, 1:10-11, 13, 15, 15:22).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바울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려 함에도 계획한 바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1. 가는 목적을 확인하십시오(23-24절).
바울에게 로마행 목적지가 아니라 서바나(스페인) 선교를 위한 경유지였습니다. 이 사실은 로마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니 이상 로마행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가야 할 이유와 가는 목적을 혼동하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방향을 바꾸십시오.
로마행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반드시 지금 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서바나로 가는 길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직접 방문보다는 편지를 보내기로 합니다. 편지는 직접 방문보다 비효율적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는 <로마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열린 길로 들어가십시오(25-29절).
예루살렘행은 로마행과는 정반대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로마를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열린 길도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발로 인해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군인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압송됩니다(참고, 행23:11). 이것으로 볼 때 바울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이 막히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 길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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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이 아니라 개혁이다

2023. 2. 5. 12:29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2.05.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12:1-2
제목 : 개선이 아니라 개혁이다

 

 

로마서 12장 1절의 "그러므로"는 1장부터 8장까지의 복음으로 인한 구원과 9장부터 11장까지의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결론을 이끄는 말입니다. 따라서 12장 이하의 내용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인데, 당시 상황에서 볼 때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개선'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상태로의 '변혁'적인 모습입니다. 구원받은자의 삶은 카멜레온의 변화가 아니라 번데기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1. '영적 예배'(절)
로마교회의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은 제사나 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생소한 것은 '너희 몸을 산 재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예식의 예배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뿐만 아니라, 삶과 행동 하나하나까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참고, 3-13절).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절 상).
'이 세대'란 여전히 악하고 죄의 유혹이 있는 세상을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문제 많은 세상으로부터 숨거나 도망갈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면서도 세태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본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손해를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19절)
구원받은 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변화는 자기 의지나 신념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심으로 일어나는 혁신적인 변화입니다(참고, 겔36:26-27, 롬8:13-14). 그리고 이 변화는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쁜 뜻을 이루어감으로 행복과 감사의 열매를 맞보게 합니다(참고, 14-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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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계획

2023. 1. 29.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29.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9:6-24
제목 : 하나님의 구원 계획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를 베풀며 인도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예수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의도하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런 의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인가?'(6절).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 대한 것이기에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심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실하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2.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14절).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택을 결정한다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바로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그들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이 결정된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모세에게는 은혜를, 완악함을 택한 바로는 그대로 됨을 확인해 줍니다.

3. '왜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는가?'(19절).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왜 우리를 책망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여러가지 종류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고, 또한 잘못 사용하여 '진노의 그릇'과 잘 사용한 '긍휼의 그릇'에 대해 판단할 권한이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책망은 결국은 우리가 인생을 잘못 산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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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중에 만난 성령

2023. 1. 22. 12:11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22.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8:1-2
제목 : 절망 중에 만난 성령

 

 

성경 66권의 요약이 로마서라고 하고, 로마서의 핵심이 8장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절망 중에 고통하는 성도들에게 분명하고도 명확한 해결의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낙심할 때 다시 일어나 성화의 삶을 힘차게 달리레 하는 하나님의 성령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1.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받고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이 있음에도 여전히 죄의 문제로 절망하는 7장의 상황을 말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실제 삶에는 여전히 죄인으로 사는 상황을 말합니다.

2. '스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죄성으로 인해 죄의 종노릇하기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으로 죄와 상관없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성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비록 여전히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예수 안에 살아가려고 애쓰다 보면, 예수 안에 여전히 죄인인 나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있는데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살게 하는 '돕는 배필'('에쩨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4. '정죄함이 없나니'
죄가 율법으로 우리를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죄책감이나 아픔 기억으로부터 자유케하여 성령과 함께 생활하게 합니다. 회개는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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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았습니까?

2023. 1. 15. 12:33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15.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6:3-11
제목 :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면 죽어서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신앙생활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왕으로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그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받은 어떤 모습닐까요?

1.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3-5절).
칭의를 통한 구원의 모습을 '세례'의 의미와 연결해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가 의미하듯, 죄에 대하여는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가는 천국행 티켓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로 살아가는 실질적인 생활입니다.

2.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6-9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구원시키신다'는 촥증이 아니라, 왕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참고, 마6:33, 고후5:15). 와의 명령에 순종하면 왕은 그 백성을 보호하고 바르게 인도하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푼 것은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아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3. 이 땅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10-11절).
구원은 새롭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참고, 4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11절)로 여기라는 것은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입니다(참고, 롬6:1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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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어라

2023. 1. 8. 12:3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1.08. 주일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2:17-29
제목 : 가면을 벗어라

 

 

로마 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였지만(참고, 1:8), 복음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이런 교회에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기 상태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모르면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있기에 굳이 복음이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의 상태를 X-ray,  초음파, MRI 등으로 찍어서 적나라하게 들춰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1.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할례는 하나님 백성의 징표로서 초대교회 시기에는 '유대인이다'라는 상징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육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고백과 실천이 더 중요하듯, 기독교인에게도 '교회출석', '예배참석' 등의 관점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고백으로 이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2. '율법 조문에 있지 않고 영에 있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세부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면서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측정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참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신앙적인 지침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보다는 그런 지침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헌신과 예배의 삶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3. '칭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하나님보다는 주변 사람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은 사람의 칭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며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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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외면한 사람들

2022. 12. 25. 12:31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2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9-13
제목 : 예수를 외면한 사람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왜 몰라봤을까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하여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잘 믿는다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점이 안타까워서 빛과 어둠의 상식적인 원리를 사용하여 예수를 외면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 전의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겠습니다.

1. '깨닫지 못하더라'(5절).
'깨닫다'(헬 : '카타람바노')는 의미는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증거를 통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신 예수가 어둠인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한' 것은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입니다(참고 요3:19-2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세상의 쾌락과 죄악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외면한 것입니다.

2. '알지 못하였고'(10절').
예수가 빛임을 증언해주기 위해 세례요한까지 왔음에도(참고, 6-8절),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달랐기에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모른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외면한 것입니다.

3. '영접지 아니하고'(11절).
'영접하다'(헬 : '파라람바노')라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통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도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생활하기가 불편하고 힘들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 삼으면 주인의 권세가 주어짐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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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비전

2022. 12. 18. 12:32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18. 주일오전예배
본문 : 갈라디아서 6:17
제목 : 에클레시아의 4가지 비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가 추구하려는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모이고 흩어지기만을 반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중요한 목적을 공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본문인 17절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이자 바울이 에클레시아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신앙고백이며 바울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고백을 우리의 신앙과 에클레시아의 비전과 목적으로 삼아야겠습니다.

1. 예수가 해답되는 삶.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지금까지 전한 말 외에 더해줄 말이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해답이고, 목적이고, 비전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입니다(참고, 15절). 예수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언저리 문제로 더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데서 신앙의 목적과 비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가 주인되는 삶.
'예수의 흔적'에서 '흔적'(헬: 스티그마)이란 '낙인'으로서 노예나 가축의 소유를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이런 표현은 예수가 주인되는 성도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종이라면 주인인 예수만을 따르고 드러내고 자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전하고 가르친 것을 상기시킵니다.

3. 예수와 함께 하는 삶.
본문에서 '흔적'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참고, '스티그마타'). 이것은 바울 자신의 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바울 스스로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예수의 것으로 낙인을 찍는다는 의미입니다.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모든 것이 예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산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예수의 '낙인들'을 가진 모임이 에클레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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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2022. 12. 11. 12:3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11. 주일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1:2-3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에클레시아'는 기원전 4~5세기경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서 누구나 익히 일고 있는 용어였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공동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명칭을 신조어가 아닌 기존의 용어를 차용한 것에는 어떤 의도 가 있었을까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차용한 의도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1. 에토스(Ethos)가 아닌 로고스(Logos).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로 모이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언급한 '에코스' '파고스' '로고스'의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당시 가장 선호되었던 '에토스'를 버리고 '로고스'를 앞세우는 공동체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각오였습니다.

2.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이뮤니타스(Immunitas)의 조화.
'커뮤니타스'는 개인적인 생활과 공간에서 나와 공공과 공동을 위한 삶으로 헌신하는 것이라면, '이뮤니타스'는 결정된 사실에 대해 주변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의미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를 전파하려는 신앙공동체의 본질과도 같았습니다.

3. 참석(Attending)이 아닌 참여(Participation).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는 에클레시아는 단순히 모임에 '참석'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열띤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온전히 순종하고 헌신하는 '참여'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한 에클레시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헌신과 순종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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