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의 여인
삶에서의 ‘탁월함’은 ‘특별함’을 전재로 합니다. 우연히 탁월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베다니 동네의 마리아는 주목할만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알고 있듯이 마리아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으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3남매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방문에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로 분주하였지만 막내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참고, 눅10:38-42).
시간이 지나, 오빠 나사로가 중한 병으로 사망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울며 오빠의 죽음을 애통하였습니다(참고, 요11:32-33).
또 다시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앞서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실 때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진 나드 향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충격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참고, 요한복음12:3).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데 허비한다는 다른 제자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을 극찬합니다.
[막 14:8-9]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단순히 언니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섬기는 일보다는 가만히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나타날 때 등장하는 말이 ‘발(헬: 푸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예: 발치, 발 앞에, 발에 붓고..).
스승의 발은 제자들이 위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발’로 표현합니다.
(행 22: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문하’라는 단어가 발을 의미하는 ‘푸스’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훈련을 받은 ‘제자’라고 증명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말씀을 듣고,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순종을 표현하였고, 제자로서 스승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하여 값진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예수님은 칭찬하셨고 복음과 함께 마리아의 이런 모습도 전파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는 동명이인이 많은 다른 마리아와 구별하기 위해 베다니의 마리아의 별명을 ‘발 아래의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여인임에도, 나이가 어림에도, 가난한 가정임에도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고백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의 ‘발치’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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