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4. 24. 금요예배
본문 : 예레미야 42:19-22
제목 : 기도 아닌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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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19. 주일 예배
본문 : 다니엘 12:4
제목 : 코로나19가 주는 교훈.
코로나19오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14세기의 흑사병, 15세기의 천연두, 19세기의 콜레라, 20세기의 스페인 독감처럼 역사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단지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유는 직접 경험하고 있고, 세계화 시대를 맞아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소식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세상을 바르게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빨리 왕래(히: 슈트)'는 '두루다니다' '방황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지식을 억기 위해 또 많은 지식으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다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19를 보면 그 원인을 산업화, 자본화, 세계화에서 찾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많은 종류의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전파될 가능성이 더욱짙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마지막때의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두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close)하고 봉합(seal)하라'라고 하십니다(4, 9절). 그 이유는 인간의 지식증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거나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으로 신앙의 기준인 말씀까지도 바꿀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인간의 지적 수준은 높아지고, 교통과 통신의 발전으로 세계화는 더욱 지속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도 인본주의, 실용주의, 현실주의에 물들어 성령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해질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계시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뉴스보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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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17. 금요예배
본문 : 예레미야 41:3-8
제목 : 드러나는 믿음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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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12. 주일 오전1부예배
본문 : 고린도후서 5:14-17
제목 :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의 치유.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연히 감염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이유 없는 고통에 몸부림칠 때가 있고... 이런 상황 속에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 앞에선 우리에게 성령의 깨닫게 하심의 은혜를 누려봅시다.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14절).
14절에서 '한 사람'은 예수님이고, '모든 사람'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친히 동참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예수님도 동일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같이 단단히 붙잡다')'하기 때문입니다.
2.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16절).
이해할 수 없는 아픔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묻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어째서' 등과 같은 거의 모든 질문은 인간중심, 자기중심의 사고입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을 '육신을 따라 아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그런 기준의 사고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생각과 이해이 전환을 말합니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육신을 따르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3.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17절).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의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토록 하는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15절),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16절) 새로운 삶의 태도로 변화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모든 사건들이 다 이해되고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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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05.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요한계시록 2: 8-11
제목 : 이것이 실상입니다.
서머나는 소아시아의 3대 항구도시 중 하나로 부유하고 황제숭배에 앞장서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세워진 서머나교회는 많은 핍박과 비방 속에서 신앙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예수님은 삶의 '실상'을 말씀하면서 오히려 부요하고(9절), 생명의관(10절)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삶의 '실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1. 궁핍의 실상(9절 상).
서머나 교회를 향해 경제적으로 궁핍(헬:'프토케이아' = 가난, 거지)하지만 부요한 자라고 하는 이유는 가난과 부의 기준이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계3:17).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부요한 자의 삶을 누립니다.
2. 비방의 실상(9절 하).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향해 비난과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믿는 자들이 아닌 사탄의 무리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3. 고난의 실상(10절).
잘 믿는다고 고난이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의 한 가운데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정도나 크기보다 죽도록 충성('피스토스' = 믿음)하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기회를 만듭시다.
4. 죽음의 실상(11절).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식적인 죽음과 영적인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만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실상은 둘째 사망입니다(참고, 계20:12-15). 둘째 사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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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예레미야 3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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