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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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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2022. 12. 11. 12:3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2.11. 주일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1:2-3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의도

 

 

'에클레시아'는 기원전 4~5세기경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서 누구나 익히 일고 있는 용어였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공동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명칭을 신조어가 아닌 기존의 용어를 차용한 것에는 어떤 의도 가 있었을까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차용한 의도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1. 에토스(Ethos)가 아닌 로고스(Logos).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로 모이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언급한 '에코스' '파고스' '로고스'의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당시 가장 선호되었던 '에토스'를 버리고 '로고스'를 앞세우는 공동체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각오였습니다.

2. 커뮤니타스(Communitas)와 이뮤니타스(Immunitas)의 조화.
'커뮤니타스'는 개인적인 생활과 공간에서 나와 공공과 공동을 위한 삶으로 헌신하는 것이라면, '이뮤니타스'는 결정된 사실에 대해 주변 상황에 영향받지 않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의미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를 전파하려는 신앙공동체의 본질과도 같았습니다.

3. 참석(Attending)이 아닌 참여(Participation).
국가적인 중대사를 결정하는 에클레시아는 단순히 모임에 '참석'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열띤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온전히 순종하고 헌신하는 '참여'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한 에클레시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헌신과 순종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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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이미지

2022. 12. 4.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2. 12. 0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에베소서 5:29-33(신약 316면)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이미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의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과 이와 같은 신앙으로 모인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에클레시아를 소개하고 있는데 '나라' '가정'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 특징을 소개합니다. 이런 특징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앙공동체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1. 나라 = 세상 나라와 구별되는 거룩성(참고, 행5:30-32).
에클레시아나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영적 역역입니다. 이런 모습을 세상에서 쉽게 경험하는 '나라'의 이미지로 설명하는데,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나라와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2.  가정 = 다름을 뛰어넘는 사랑(참고, 마12:49-50).
구약시대의 성도와 신약시대의 성도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에서는 하난미을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성도들 간에는 형제 또는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다름'의 경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임을 말해 줍니다.

3. 몸 = 각 지체가 가진 기능의 유기적 연합(참고, 고전12:27).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가진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곳임을 사라마 지체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각 지체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때 건강한 상태가 되듯, 모든 성도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지체와 유기적인 연합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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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3가지 목적

2022. 11. 27.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27.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4:42-44
제목 : 에클레시아의 3가지 목적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한 모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친히 자기 삶과 사역의 목적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과 그 공동체도 함께 공유되어야 합니다. 초기 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예수님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고 실천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화된 사회를 살아가더라도 이러한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확인하여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부터 가졌던 계획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주인과 왕으로 섬기며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 대상 중에서 같은 형상으로 지은 인간을 통해 더욱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클레시아(교회)였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공동체로 세웠습니다.

2. 복음.
예수님 당시의 복음('유앙겔리온')은 황제의 취임이나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쁜 소식'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복음의 의미를 예수와 제자들은 '예수가 왕'이며,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승리'라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였고, 이를 믿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의 목적은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보내심.
에클레시아의 '사도성'은 공동체가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공동체임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가지고 자신이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담장을 높이 쌓기보다는 복음의 소통을 위한 길을 놓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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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둥

2022. 11. 20.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2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16:31-33
제목 :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둥

 

 

지난주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초'에 이어서 에클레시아가 힘든 여러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 갈 수 있었던 '기둥'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여 버리고 도망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초기 에클레시아에 임했던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튼튼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 관계.
에클레시아의 설립목적은 어떤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도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함으로 영광 받기 위함이 아니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함께 계심으로 제자들의 배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곳입니다.

2.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을 향해 안타까워하는 것이 '함께' 살면서도 모든 것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듯,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존재의 의미(Being)가 아니라, 삶을 함께 누리며 동거하는 생활의 의미(Doing)입니다.

3. '안에'
예수님은 혼자서도 세상을 이기셨지만, 인간은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지 인간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 '안에' 거함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하듯 '안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자양분을 먹고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영적 자양분을 통해 살아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초

2022. 11. 13.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13. 주일오전예배
본문 : 갈라디아서 3:1-6
제목 : 에클레시아의 세 가지 기초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가장 먼저 쓴 편지로서 교회가 세워지는 초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면서 세워진 교회들이 어떤 가르침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었으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진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교회 안팎의 여러가지 이단 사상에 미혹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진 세 가지 핵심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오늘날의 교회와 에클레시아가 깊은 울림으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1. 십자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십자가는 범죄자를 사형시키는 형벌이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자 예수를 따르는 삶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참고, 2:20). 즉, 초대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주인임과 이런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수반되는 어떤 고난이나 고통도 다 감수하겠다는 고백으로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2. 성령.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이미 '받았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2, 3, 5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신령하고 신비로운 체험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육적인 삶'(참고, 5:19-21)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변화된 삶(참고, 5:22-23)을 사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3. 믿음.
이방인들로 구성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을 '율법의 행위'와 비교하고 있습니다(2, 5절). 믿음은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과는 달리,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헌신과 순종의 자세입니다. 이런 믿음의 대표적인 예를 아브라함으로 들고 있습니다(6절).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믿음의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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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감사'란 단어가 없는 이유

2022. 11. 6. 12:19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1.0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시편 136:1-3
제목 : 구약성경에 '감사'란 단어가 없는 이유

 

 

추수감사절이 '추수'에 대한 감사라면 추수한 것이 없는 사람은 감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한정하기보다는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유래된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히브리어에는 '감사'란 단어가 없다.
히브리어에는 '감사'란 단어가 없습니다. 손('야드')에서 파생되어 '던지다' '쏘다'란 의미를 가진 '야다'(명사형은 '토다')란 단어를 빌려 '손을 들다' '찬야하다' '고백하다' '감사하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감사'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감사'의 의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존재에 감사.
시편 136편은 절마다 '감사(야다)'란 말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야다'는 '여호와' '하나님' '주'가 주어인 1, 2, 3절과 26절에서만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성도들은 감사할 제목이나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감사할 유일한 이유입니다.

3.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됨에 감사.
4절부터 25절까지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깨달음을 고백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날의 감사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좋은 것을 주셨는가'로 결정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참고, 살전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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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에클레시아

2022. 10. 30. 12:1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0.3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상 23:15-18
제목 : 광야 에클레시아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의 마음을 알고 요나단은 다윗과 눈물의 작별을 고합니다(참고, 20:41-42). 그러나 다윗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지는 것을 보고 광야 깊은 곳까지 찾아가서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협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1.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위로.
사람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직면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의 회복을 위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에클레시아입니다.

2.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권면.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과도 싸워 이길 정도의 믿음의 사람이었는데 사울의 추격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믿음의 동역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는 믿음의 동역자가 모인 곳입니다.

3.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망.
왕이 되려는 것은 다윗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왕이 되기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현실 상황과 관계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망은 다윗을 다시 일어나게 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낙심과 절망 중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말씀의 소망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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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한 사람

2022. 10. 23.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0.23.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상 14:6-7
제목 : 행동하는 한 사람

 

 

모두 숨죽이고 있을 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을 때,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말씀을 듣고 읽어도 감동이 없을 때, 그러나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갈 때 성도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진퇴양난의 상황에다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책망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참고, 13:13-14).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이 보여준 믿음의 모습을 함께 살펴봅시다.

1. 행동하는 한 사람(6-7절).
이스라엘 백성은 다 흩어지고 남은 600명으로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상대해야 할 사울은 자기 안전에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참고, 2절). 이때 요나단은 비록 혼자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적진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 20명 정도의 적군을 죽이는데(참고, 14절), 이 여파로 전쟁의 승기를 잡게 됩니다. 걱정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2. 숨겨진 사람들(20-21절).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블레셋 영토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강제로 징집되어 전장에 오게 되었습니다. 동족과 상대로 싸워야 할 이들이 요나단의 모습을 보고 도전받아 오히려 블레셋 군인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다 적군으로 보이지만 믿음의 헌신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숨겨 놓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3. 숨은 사람들(22-23절).
이런 상황을 도망가 숨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다가 다시 돌아와 함께 싸움으로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현 상황만 보면 혼자지만, 순종하여 헌신하면 숨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감동과 도전을 주어 삶과 신앙의 회복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단 한 사람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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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밭을 보라

2022. 10. 21. 22:11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0.1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4:35
제목 : 눈을 들어 밭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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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9.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2.10.09. 주일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후서 2:4
제목 : 바울의 아픈 손가락

 

 

2차 선교 여행 중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1년 6개월을 머울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떠났습니다(참고, 행18장).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바울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고(고전5:9), 사람을 보냈고(고후9:3), 자신도 몇 번 다녀올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쏟았습니다(고후13:1). 그 이유는 가장 특별하게 여긴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들이 바울을 아프게 하는 손가락일까요?

1. 자기애적 우월주의(고전 1:17).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교회의 분열 상태를 언급하면서 바울이 베푼 세례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바울의 세례가 분열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바울에게서 세례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세례가 가장 가치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의 경력도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참고, 고전1:29-31).

2. 주관적 지식주의(고전 2:6-8).
고린도 지역은 상업과 학문이 발달한 곳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경험한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의 교인들이 바울에게는 아픈 손가락들이었습니다.

3. 영적 엘리트주의(고전 3:1).
'신령한 자'(헬: '프뉴마티코스')란 말은 바울 서신에 24번 사용되었는데 고린도전서에서만 15번 사용될 정도로 영적인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을 향해 어린 아이들로 취급하겠다고 합니다. 영적인 삶이 단순히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며 영광 돌리는 신실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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