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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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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08

  1. 2023.05.28 제자입니까?
  2. 2023.05.21 제자, 사도, 장로
  3. 2023.05.14 무너진 가정의 회복
  4. 2023.05.07 부활 신앙
  5. 2023.04.30 부활이 일으킨 변화(3)
  6. 2023.04.23 부활이 일으킨 변화(2)
  7. 2023.04.16 부활이 일으킨 변화(1)
  8. 2023.04.09 부활을 부활시키자
  9. 2023.04.02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
  10. 2023.03.26 욥의 세 가지 실수

제자입니까?

2023. 5. 28.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5.28.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열왕기하 2:9-10
제목 : 제자입니까?

 

 

엘리사를 제자 삼은 엘리야는(참고, 왕상19:19-21) 하늘로 올라기기 전에 길갈, 벧엘, 여리고 그리고 요단까지 함께 여행하면서 엘리사가 참 제자로 성장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에 엘리사는 "갑절의 성령"을 구함으로써 선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도전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지자의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영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참고, 3절, 5절).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모습이기보다는 당시의 사회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런 상황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2. 엘리사의 원함.
제자로서 스승에게 구할 것이 세상의 명성이나 안전이 보장되는 스승이 행하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이어받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눈 앞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을 알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스승으로부터 세상을 바꾸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음을 깨달았고 이것을 구했습니다.

3. 엘리사의 사역.
엘리야의 승천 이후, 엘리사가 여리고와 벧엘에서 행한 사역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면을 고치는 사역자임을 보여줍니다(참고, 왕상2:19-20). 즉, 제자란 스승의 사역만을 이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제자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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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사도, 장로

2023. 5. 21.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5.2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베드로전서 5:1-3
제목 : 제자, 사도, 장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헌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남다른 노력과 수고를 했지만 결국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다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한 교회를 섬기는 장로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직분들이 주는 의미를 통해 신앙생활의 진면목을 함께 살펴봅시다.

1. 제자.
제자란 문자 그대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나, 유용한 것을 배워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의 시작은 무엇인가 유익을 얻고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사도.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일을 감당하는 자로 세워졌습니다(참고, 행1:22). 사도는 성령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가 주이심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장소나 형편보다 전하는 복음과 메시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3. 장로. 
장로는 일반적으로 어른이나 연장자로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서는 나이보다는 신앙적인 면에서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장로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제자로, 사도로, 또 다른 장로로 세우기 위해 가르치고 섬기는 일을 합니다. 베드로가 가진 마지막 직분은 장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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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가정의 회복

2023. 5. 14. 12:29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5.14. 주일오전예배
본문 : 룻기 2:19-23
제목 : 무너진 가정의 회복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사사시대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예상과 달리 이방인이요, 과부인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입니다. 이들이 알려주는 것은 무너진 가정이 구원자인 보아스(예수님)를 통해 회복되듯이, 사사시대의 영적 타락과 부패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회복도 예수님으로 가능함을 기억합시다.

1. 믿음의 자리를 돌아오라(19절).
사사기에서 베들레헴은 떠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는데(참고, 삿17:8, 19:1), 그 결과는 신앙적 타락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도 떠남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다시 돌아옴으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다 잃어버리고 빈손이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회복은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예수님께 집중하라(20-22절).
'기업 무를 자'란 빚을 갚거나 가문의 대를 이어줄 친족을 의미합니다. 룻과 나오미에게 보아스는 먹을 양식을 공급하는 부자로 여겨진 것이 아니라,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구원자'로 여겨졌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예쑤님은 특정한 문제만을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그 운명까지 바꾸실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3. 한 마음으로 연합하라(23절).
룻과 나오미는 어려움 환경 속에 살고 있지만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권면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룻은 시어머니의 인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된 마음을 통해 더 풍성하게 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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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

2023. 5. 7.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5.07.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나 2:4-9
제목 : 부활 신앙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부활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은 신약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이런 신앙과 삶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입니다. 요나는 BC 750년에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부활을 믿는 자가 가져야 할 신앙 태도를 실제적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자신이 직접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고백하는 신앙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1. 성전(예수님)을 바라보겠나이다(4절).
물고기 뱃속에서 드려지는 요나의 기도 속에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입니다. 단순히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몸이 성전된 예수님을 바라고 소망하며 의지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9절).
요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였음에도 그 직분을 망각하고 도망가다가 풍랑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혔습니다. 이 같은 절망의 순간에 깨달은 것은 자신이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지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거룩한 고백은 새로운 부활의 삶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3.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절).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 줄 것을 알았을까요? 요나에게 '구원'은 절망의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깨닫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구원은 하나님을 다시 깨닫고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주어진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구원이 되는 고백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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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일으킨 변화(3)

2023. 4. 30.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4.30.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요한복음 2:19-22
제목 : 부활이 일으킨 변화(3)

 

 

성전은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의 의미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의미와 성전이 된 예수님의 육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부활로 인하여 드러난 신앙의 변화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1. 예수님이 성전 되시다.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성정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전이 무너짐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통으로 설명하셨습니다(참고, 막13:8).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의 신분이 드러남으로써 신앙의 중심이 성전에서 예수님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이고 예수 안에서 있음을 알려 줍니다.

2. 교회가 시작되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와 절기의 유대교 신앙은 막을 내리고, 혈통이나 성별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그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징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예수입니다.

3. 일꾼들이 세워지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져서 섬기는 일꾼으로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고 유지되며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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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일으킨 변화(2)

2023. 4. 23. 12:30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4.23.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2:33-35
제목 : 부활이 일으킨 변화(2)

 

 

시편16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변화에 대하여 설교한 베드로는 계속해서 시편 110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신분이 누구인가를 설명합니다. 한낱 갈릴리의 가난한 목수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기득권에 반발하는 사회 개혁가가 아니라 예수는 예언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라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1. 성령이 임하셨습니다(33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라고 증언하였고(막1:8), 예수님 자신도 부활 승천함으로써 보혜사이신 성령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요16:7).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지시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였습니다(행1:4-5).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2.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34-35절).
시편 110: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주"라고 고백한 사실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임을 알려줍니다(참고, 막12:36-37). 따라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을 하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3.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입니다(36절).
예호와 하나님은 위엄과 영광스럽고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감히 마주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삶을 사셨기에 우리와 충분히 공유하고 공감하는 하나님으로서 친밀함과 친근함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고 동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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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일으킨 변화(1)

2023. 4. 16.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4.1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2:25-32
제목 : 부활이 일으킨 변화(1)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술 취한 사람들로 오해받자 베드로는 처음으로 설교하게 됩니다. 성령에 관하여 설명하나가(15-21절) 본론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전하고 있는데, 시편 16장을 언급하면서 메시아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증명합니다. 베드로는 시편 16장이 메시아 시편으로서 다윗의 입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고백을 담고 있음을 소개하는 것에서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1. 존재감의 변화(시 16:1-3절).
시편 16장에서 "나", "내가"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다면 오늘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있는 성도들'로 즐거움을 삼으셨습니다. 성도의 존재감은 무슨 일을 해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2. 삶의 의미 변화(시 16:4-8절).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여호와가 나의 산업이며 분깃'(5절)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날마다 밤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재물과 권세가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됩니다.

3. 영, 혼, 육의 변화(시 16:9-11절).
이런 결과들로 인해 당면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게 됩니다. 즉,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의미(예: 나사로)가 아니라, 삶의 가치와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다윗은 장차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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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부활시키자

2023. 4. 9.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4.09. 주일오전예배
본문 : 베드로전서 1:3-5
제목 : 부활을 부활시키자

 

 

네로 황제의 박제로 각지로 흩어진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편지하는 베드로는 가장 먼저 부활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영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속죄만 강조하다 보니 용서 부활시켜야 할 부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거듭남(2절 상).
거듭남은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전에는 예수를 부인했지만, 부활을 목격한 후 모두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부활은 장차 변화될 우리의 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2. 산 소망(3절 하).
일반적인 소망에 반하여 '산 소망(Living Hope)'은 살리는 소망 또는 살아있는 소망을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세속적인 소망에서 진정한 소망이 되는 예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3. 유업을 잇게 함(4절).
우리를 위해 하늘에 있던 썩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자가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 겪지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서도 환경에 얽메이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보호(5절).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안전을 위함이 아니라, 예비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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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2023. 4. 2.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4.02. 주일오전예배
본문 : 마가복음 11:2-3
제목 :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동안 여러번 예루살렘을 방문했었겠지만 오늘 마지막 방문은 가장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왜 일반적인 왕이나 메시아의 등장처럼 화려하고 위엄있는 모습이 아닌 사람이 타 보지 않은 나귀의 새끼를 타고 가셨을까요? 여기에 담긴 교훈을 알아봅시다.

1. 순종하는 신앙.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약 500년 전에 슥9:9절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참고, 마21:2-5). 자신이 메시아이자 왕이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려는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줍니다.

2. 겸손한 신앙.
슥 9:9에서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은 '겸손'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뿐이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새끼를 타신 것은 그만큼 겸손에 대한 각별한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뽑은 칼보다 칼집에 꽂힌 칼이 더 위엄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거룩한 신앙.
'거룩'은 세상과 다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10절) 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와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라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실패처럼 보였지만 결국 영생의 승리의 길이듯, 성도의 삶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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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세 가지 실수

2023. 3. 26. 12:28 | Posted by 소망지기

 

2023.03.2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23:10-17
제목 : 욥의 세 가지 실수

 

 

마귀가 욥에게 고난을 통해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참고, 욥1:11, 2:5). 그러나 이런 점에서 무지했던 욥은 하나님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욥의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나중에 깨닫고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회복이 일어나지만(참고, 욥42:5), 고난 중에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점을 살펴봅시다.

1. 억울함(10절).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하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6-9절).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고난은 해결될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안타깝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2. 자기 의(11-13절).
억울함의 근원은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 의'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모든 선악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려는 죄의 영향 때문입니다(참고, 창3:5). 인간이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모르고 자신이 행한 일만을 생각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오해(13-17절).
그 결과 하나님을 오해하는데, 하나님은 누구의 말이나 형편을 살피지 않는 고집불통이고, 예측할 수 없는 분이며, 자기 일 외에는 무관심한 분으로 여깁니다(참고, 욥24:1-12). 결국 욥은 고난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 자체가 두렵다고 고백합니다(16-17절). 하나님을 자신의 상황에서 조성된 단편적인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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