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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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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3. 26 주일 오전예배

 

 

로마서 14:17

 

 

 

오늘 본문은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 '평강', '희락'.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평강'과 '희락'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된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느 것이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갈5:22). 이 두가지가 하나님나라에서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1. '평강' - 헬: '에이레네', 히: '샬롬'  번역: 평강, 평화, 평안, 화평

유대인들에게 '샬롬'은 일상에서 서로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샬롬'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느 사람 관계에서나 주변 환경과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안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요14:27).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에서는 세상적이고 일반적인 '평안함'이 우선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평안함'에 있습니다. 이 평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엡2:14-15). 여러분은 하나님과 안녕하십니까?

 

2. '희락' - 헬: '카라'  번역: 기쁨, 즐거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나라는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와는 달리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도 역시 슬픔과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마13장에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종들은 가라지를 보면서 불평하지만 주인은 알곡에 주목하며 추수때를 기다립니다. 하나님나라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기뻐서 기쁜것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발견합니다(빌4:4).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웃을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뻐할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17. 03. 19 주일 오전예배

 

 

로마서 14:17

 

 

 

오늘 본문은 하나님나라의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 '평강', '희락'. 오늘은 그 첫번째인 '의'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항상 '의'와 함께 세워집니다(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의'는 어떤 의미이며 모습일까요?

 

1. '의'란 무엇인가?

세속적인 '의'의 의미는 그 사회의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올바름'입니다. 그래서 세속적 '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모습과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성경적인 '의(히: '짜다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올바름입니다. 그래서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동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게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 또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의'가 만들어 집니다.

 

2. 하나님나라의 '의'의 실제.

하나님나라의 '의'는 세속적인 '의'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하다가 창38장은 유다의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그것도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이유(참고, 창49:8-12, 룻4:12, 마1:3)는 며느리 다말의 믿음때문입니다. 다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기에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혈통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의'가 되었습니다(창38:26).

 

3. 어떻게 의롭게 살 것인가?

사람 사이에서도 신뢰의 관계가 중요하듯, 하나님나라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하는 '의리(義理)'의 삶입니다. 종교적인 열심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참고, 삼상8:7-8) 인격적인 관계의 삶이 하나님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5) - '감추인 보화'

2017. 3. 12.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3. 12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13:44

 

 

마태복음 11장에는 7가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시려고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이에 합당한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를 누립시다.

 

1. 일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

'보화'이 하나님나라는 '밭'으로 상징되어지는 우리의 일상속에 존재합니다(참고, 눅 17:21). 교회, 기도원, 부흥회처럼 '있을 만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듯이 모든 곳에 존재하시기에 하나님이 계실만한 특별한 곳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상황속에도, 기쁘고 즐거운 삶속에도, 고통과 번민의 현장 속에도 하나님나라는 존재합니다.

 

2. 일상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나라.

그런데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신앙의 열심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감추어 있기 떄문이듯, 비록 눈에는 '밭'만 보이겠지만 그 안에 '보화'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단순히 평범한 일상이 아닌 보화로 가득한 의미있는 곳입니다.

 

3. '밭'을 보지말고 '보화'를 보라.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다음 반응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천국은 '참노'하는 자의 것처럼(마 11:12),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 밭을 삽니다. 이것은 밭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보화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사람은 밭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입니다.

 

 

 

 

2017. 03. 05 주일 오전예배

 

 

이사야 11:6-9

 

이사야 11장은 하나님이 메시야를 통해 회복하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참고 사64:25). 특히 오늘 본문은 각종 짐승들을 통해 장차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하나님나라는 어떤 모습입니까?

 

1. 나는 나로 존재해야 합니다.
본문에 여러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마찬가지로('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나'는 '나'로 존재함을 뜻합니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실수중의 하나가 바로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가 지쳐버린다는 것입니다,

 

2. 유일한 나는 유일한 너와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함이 각기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나의 '다름'은 나의 개성이나 독립성을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름'과 옂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유다의 사자인 예수님이 어린양이 된 것은 사자로서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인 인간과 연합되고자 스스로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우는 하나님나라는 이웃을 위하여 스슷로 나의 잇빨을 뽑고, 발톱을 뽑고, 맛없는 풀도 기꺼이 먹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지식은 무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삶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히: 다아트)'에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삶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knowing about God)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knowing God)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없음변 '구별'과 '차별', '연합'과 '통합'의 의미를 분별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7. 02. 26 주일 오전예배

 

 

레위기 11:44-47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합니다. 그의 나라 백성들 또한 거룩한 백성들이어야 합니다. '거룩'(히:'카도쉬')이란 '구별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왜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할까요?

 

1. 삶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45절). 그래서 그의 자녀들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가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세상과 '다름'입니다. 그의 백성들이 세상과 비슷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2.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자주 등장하는 '정하다' '부정하다' '깨끗하다' '더럽다'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보시기에 좋았지만 죄인들은 구원하기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정했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사는 것만이 우리의 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를 때 '깨끗한' 삶이 됩니다.

 

3. '잘사는 것'이 아닌 '다르게 사는 것'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요 18:36).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45절).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의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바로 이러한 '다름'에서 나옵니다. '내가 다르니 너희도 다르게 살아라'.

 

 

 

 

2017. 02. 19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5:3

 

 

가난은 저주요 부유함은 하나님이 축복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가난과 부유함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첫번째로 언급하신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누구나 가난한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가난은 물질이 아닌 심령의 문제입니다.

성경적으로는 가난은 축복도 저주도 아닙니다. 단순히 성실하지 못함에 상응하는 대가(잠 10:4, 20:13) 내지는 연단의 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가난함으로 인해 마음까지도 가난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부자도 있고, 부자인 가난뱅이도 있습니다.

 

2. 가난은 '부족함'이 아닌 '낮아짐'에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마음을 항상 낮은곳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마음을 낮은 곳에 두면 주변사람들을 섬기게 되고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부한자'는 항상 자신의 창고를 체우려 하는 반면, '가난한 자'는 자기의 것으로 이웃을 섬기려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바로 이런 자발적인 가난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3. 가난은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특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참고 창 12:2). 이에 따라 아브라함은 자신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이 복받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가 아닙니다. 내가 가난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2017. 02. 12 주일 오전예배

 

 

창세기 13:14-18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은 신앙의 여정을 함께 시작했지만 그 결말을 정반대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판이하게 다른 인생의 결과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반적인 삶의 원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1. 삶의 주권을 버려야 새로운 삶을 누립니다.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은 전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삶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과 선언이 바로 ' 예배'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드린 예배가 바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삶의 예배가 회복되면 인생이 회복됩니다.

 

2. 자신의 권리를 버려야 새로운 특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분이기에 세상살이에 익숙한 아브라함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모든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거룩'이란 '분리, 분별'의 의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나의 권리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나의 '권리 포기'는 바로 거룩한 삶의 실천입니다.

 

3. 땅을 버려야 하늘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다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그네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떄에 반드시 아루어질 약속을 신뢰했습니다(참고, 히 11:10-16).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이 세상의 어떤 상황보다 더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비록 내 생애에 누리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2017. 02. 05 주일 오전예배

 

 

창세기 13:8-13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례를 아브라함과 함께 했지만 그 결과는 두 사람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믿음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과정 또한 중요합니다. 롯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비슷'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전혀 다른 신앙이었습니다. '다른 신앙'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비슷한신앙'입니다.

 

1. 기준이 잘못되면 전부가 잘못됩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가는 곳마다 예배드리며 신아생활했던 롯은 선택의 순간에 아브라함과 다른 기준을 가졌습니다.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삶의 기준이 '물'이 되고 '애굽'이 될 때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은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여지게 됩니다. 좋아서 '여호와의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여호와의 동산'입니다.

 

2. 예배는 삶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후 롯이 예배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것은 롯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말해줍니다. 예배는 단순히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드려지는 예식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을 때부터 형식적인 예배는 드렸을지라도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은 없습니다.

 

3. 순종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불순종입니다.

19장에 천사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장면을 보면 롯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19:15,16).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주장을 더하고 있습니다 (19:18-20). 결국 산으로 도망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주장같은 '불순물'이 개입되면 그것은 불순물종이 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참고, 창19:37-38).

 

 

 

 

2017. 01. 29 주일 오전예배

 

 

마가복음 10:17-25

 

 

본문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에서 동일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전해 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는 내용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생활의 목표와 의미에 대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같이 살펴 봅시다.


 

1.영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의 관심은 미래적인 '영생'에 있는 반면, 예수님의 관심은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영생을 위해 특별한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생'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30절). 이는 영생을 위해 살지말고 하나님 나라를 살면 영생은 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교회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완벽에 가깝게 율법적인 삶을 살던 부자 청년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인정하는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신앙에 대하여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적인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만나 순종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3. '열심'이 아닌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따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영생은 인간의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칫하면 인간의 의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2017. 1. 22. 15: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7. 01. 22 주일 오전예배

 

 

이사야 11:9, 하박국 2:14

 

 

150년의 시간적 간격을 가진 두 선지자 이사야와 하박국을 통하여 범죄함으로 가득한 이 땅의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적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그의 나라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1. 물 한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세상의 나라는 대단한 것으로 인정받고 권세를 누리려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보잘것 없는 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나라입니다. 성경역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 또한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세워집니다.

 

2.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런 단순한 이치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덴에 있던 네 강 (창2:10), 에스겔이 본 환상속의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나오는 물 (겔47:2), 초막절에 성전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 (요7:38), 회복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 (계22:1-2)을 보면 항상 물이 '흘러'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물 흐르듯 항상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3. 모든 것을 덮는다.

'물이 바다를 덮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낼 때 불의한 인생들에게는 심판으로, 의로운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여겨집니다. 바다 밑의 모든 지형을 물로 덮어버리듯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와 같습니다 (참고, 마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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