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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치며 사는 삶

2019. 2. 16. 17:02 | Posted by 소망지기

부딪치며 사는 삶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미식축구입니다. 미식축구의 볼거리는 태클입니다. 선수들은 사슴의 싸움처럼 정면으로 부딪쳐 공격수의 공격을 가로 막습니다. 수비도 태클, 공격도 태클, 승리의 비결은 부딪침에 있습니다. 인생도 부딪쳐 봐야 압니다. 몸으로 부딪치지 않고 머릿속만으로 계산하는 것은 실패의 시작입니다. 

당 나라에 노생이란 청년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노인의 베개를 베고 낮잠을 잤는데, 꿈에 도시에 가서 공을 세우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얼마 안 지나 병에 걸려 죽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노생은 다음 날 아침 부귀공명도 별 것 아니구나!”하고 한탄하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꿈만 꾸다가 포기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풍자한 유머입니다. 몸을 던져보기 전에는 성패를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련의 솔제니친은 감시와 억압과 고통 속에서 26만 단어에 달하는 대작 수용소 군도를 썼습니다. 6백만 명의 정치범이 갇혀있는 소련 수용소의 내막을 고발하는 이 소설을 위하여 227명의 증언을 수집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평온한 환경에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설 내용은 스탈린뿐 아니라 당시 신성불가침이라는 레닌까지 규탄하는 것이므로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는 시작도 못할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암살당하면 비밀경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꼭 출판해 달라.”는 말을 측근에게 늘 유언처럼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계획은 이루어졌고, 마치 작은 돌멩이가 부딪쳐 큰 유리창을 깬 것처럼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인생의 중간에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부딪쳐 빛난 흔적을 남기다가도 마지막에 실망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말은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속에서는 끝까지 부딪치고 후회하지 않는 승리의 환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프랑스... 군대... 조세핀...”하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조세핀은 이혼한 부인의 이름인데, 그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세 개의 낱말이 운명하는 입술에서 새어나온 것입니다. 이 말에는 ‘그대로 눈 감기 아쉬운여운이 처량하게 감돌고 있습니다. 시인 괴테는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 빛을...”하며 숨을 거두었고, 베토벤은 친구여 박수를... 희극은 끝났다하고 말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두 열심히 산 천재들이었으나 인생의 끝자락에서는 허무함에 젖어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행복하고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열적으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이 그래도 만족할만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때로는 경제적인 위기, 애정의 위기, 결혼의 위기, 건강의 위기, 인간관계의 위기 등, 우리의 삶을 무겁게 만드는 삶의 요소들과 당당하게 부딪치며 살 때 오히려 삶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도 실제로 부딪쳐 보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어려운 일과 불가능한 일의 차이에서, 불가능하다는 일은 단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이다고 했습니다. 좋은 목재는 쉽게 자란 나무가 아닙니다. 추위와 더위, 비바람과 눈보라에 오래 동안 시달리고 부딪치면서 단단해 집니다. 문제 앞에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부딪쳐 봅시다.

2019년의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있습니다.

땅 밑에서 머리를 부딪치며 올라오는 새싹들 처럼 삶의 유리벽을 향해 부딪치며 삶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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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아래의 여인

2015. 4. 14. 21:49 | Posted by 소망지기

발 아래의 여인

 

삶에서의 탁월함특별함을 전재로 합니다. 우연히 탁월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베다니 동네의 마리아는 주목할만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알고 있듯이 마리아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으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3남매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방문에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로 분주하였지만 막내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참고, 10:38-42).

 

시간이 지나, 오빠 나사로가 중한 병으로 사망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예수님의 발 앞에엎드리어 울며 오빠의 죽음을 애통하였습니다(참고, 11:32-33).

 

또 다시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앞서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실 때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진 나드 향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머리털로 그 발을씻는 충격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참고, 요한복음12:3).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데 허비한다는 다른 제자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을 극찬합니다.

 

[14:8-9]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단순히 언니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섬기는 일보다는 가만히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나타날 때 등장하는 말이 (: 푸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발치, 발 앞에, 발에 붓고..).

 

스승의 발은 제자들이 위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로 표현합니다.

 

(22: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문하라는 단어가 발을 의미하는 푸스입니다. ,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밑에서 훈련을 받은 제자라고 증명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말씀을 듣고,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순종을 표현하였고, 제자로서 스승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하여 값진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예수님은 칭찬하셨고 복음과 함께 마리아의 이런 모습도 전파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는 동명이인이 많은 다른 마리아와 구별하기 위해 베다니의 마리아의 별명을 발 아래의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여인임에도, 나이가 어림에도, 가난한 가정임에도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고백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의 발치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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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교를 꿈꾸며

2015. 1. 24. 18:59 | Posted by 소망지기

수어지교(水魚之交)를 꿈꾸며...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는 유비와 제갈공명과의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것에 질투를 느낀 관우와 장비에게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다라고 말 한데서 기인합니다.

 

이 두 사람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많은 공을 세운 제갈공명은 모사(謀士)로서 권모술수에 능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거짓마저도 마다하지 않는 반면에 유비는 유약(柔弱)한 듯 하면서도 덕과 인정을 중시하며 포용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삼고초려 당시에도, 유비와 같은 한실 종친인 익주의 유장과 형주의 유표를 몰아내고 익주와 형주를 차지할 것을 유비에게 권했는가 하면, 적벽대전을 앞두고 손권에게는 조조가 거느린 병력 숫자를 150만 명으로 부풀려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유비에게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면, 제갈공명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정이나 도덕을 가리지 않는 목적지향의 인물이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제갈공명은 신상필벌(信賞必罰), 즉 잘못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되, 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내리는 일을 엄격히 시행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이 때문에 제갈공명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친근함을 느끼며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벌 기준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키우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몰두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인정과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는 유비에 대한 제갈공명의 충성심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권모술수에 능했다는 점에서는 제갈공명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성품과 결점이 많은 사람인데도 그들의 수어지교는 그들이 처음 만난 207년부터 유비가 세상을 떠난 223년까지 16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6년이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 것이라면 참으로 돈독한 관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실리적인 문제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모자란 부분을 충실하게 보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의 권모술수와 직설적이고 독단적인 면을 유비가 기진 포용력, 덕과 너그러움으로 감싸줌으로 널리 민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난히 유비와 제갈공명의 수어지교가 더욱 부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의 현 사회를 보면 흡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다는 느낌입니다. 연일 치열한 공방전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청렴지도(淸廉之道)는 간 곳이 없어진지 오래고, 이해와 포용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나라의 수어지교를 부러워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그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틀린 것처럼 보여지게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유비처럼 큰 아량으로 감싸 줄 수 만 있으면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맞추어 주고 채워줄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수어지교가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이 생겨날 때 비로소 건강하고 힘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을 보면,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수어지교'의 삶을 살라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회는 정형화된 신앙인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자이크처럼 서로의 틈을 매워주어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너무 가까이서 보기 보다는 좀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사람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죠. 물과 물고기의 조화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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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은혜의 함정

2014. 11. 13. 12:27 | Posted by 소망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신앙생활하는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 볼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통한 의인이 되기보다는 여전히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여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보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에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새로운 확신과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마음의 뿌리에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무조건 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의도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의 의미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인간들이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 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셔서 구원을 주시기 위함일까요? 성경은 은혜를 덧입은 성도를 ‘양자’로 표현합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양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아들로 인정하여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양자가 된 아들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자신이 양자인 것을 잊고 친아들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아버지에게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친아들의 권리를 주고 친아들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양자에게 친아들처럼 편하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기에 양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 환경을 바꾸어 주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된 아들은 친아들의 모든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을 요구하는 순간부터 이미 ‘은혜’는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 양자의 입장에서는 친아들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선택하심에 의해 아들의 자리로 불러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켜야 합니다. 아버지는 친아들처럼 행동하라고 하지만 양자에게는 여전히 얼떨떨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친아들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의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여전히 이 아버지의 호의를 감당할 수 없다는 ‘믿음의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은혜는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을 고백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이나 은혜 앞에서 우리의 의나 권리나 능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 앞에서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 앞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 앞에서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용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용서 받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은혜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죄인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겠지요.

 

안타깝게도 죄인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무례히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사와 겸손으로 채우기보다는 권리 주장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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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에 물든 기독교

2014. 10. 30. 13:54 | Posted by 소망지기

맘몬에 물든 기독교

 

 

맘몬이란 말은 헬라어 ‘맘모나스’에서 나온 말로 ‘물질’ ‘재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모두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신 것입니다(마6:24, 눅16:9, 11, 13).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재물(‘맘모나스’)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으시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맘몬이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들의 섬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다윗은 그의 생애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상 29:11-12]

(11)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2)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또한 전도서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 5: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런데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되면 자칫 재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기보다는 재물 그 자체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은 재물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재물 그 자체는 무생물적인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물질도 생명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재물은 사람에 의해 유통되어지지만 영적인 영역에서는 그 재물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재물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고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결국은 재물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조종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될 때 ‘맘모니아’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맘몬주의’ ‘물질주의’ ‘황금사상’ 등으로 이야기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맘몬주의가 우리 사회를 더 옥죄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더욱 깨어서 맘몬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많은 교인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맘몬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공의 척도요, 부흥의 기준이요, 행복의 요소로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성도와 교역자의 구별없이 맘몬을 좆아서 이리저리 불나방처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데도 이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크게, 더 비싸게, 더 좋게, 더 특별나게... 이것이 맘몬이 주는 영향력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부유해지고 넉넉해지기를 바라면 위험합니다.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합니다. 처음에는 재물을 가지고 살지만 나중에는 재물을 따라가는 삶으로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그저 우리를 편안하게 살게 하고 존재감을 드러내 주는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 자신을 섬기게끔 만드는 엄쳥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재물을 양면에 날선 칼을 다루듯이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맘몬의 위력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산산조각 나기 십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맘몬 보다 더 강력한 힘을 소유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이런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맘몬을 지배하고 통치할 능력을 덧입혀 주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빌 4:11-12]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딤전 6:6-8]

(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비록 작은 것이더라도 하나님을 위하고 그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맘몬을 지배하고 맘몬주의 아래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물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할 때입니다. 이런 능력이 준비되어질 때 모든것에 풍성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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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아니마민'

2013. 8. 10. 15:04 | Posted by 소망지기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찌는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체 수용소에 갖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부른 노래가 '아니마민'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입니다.

 

그 가사의 내용은

나는 믿는다. 나의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을. 그러나 때로는 조금 늦게 오신다 입니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하는 믿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이 되면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시대상황에 있었던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교회와 반대하는 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전쟁과 히틀러의 독재를 반대하는 교회들은 <고백교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어 저항운동에 나섭니다. 이 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본 훼퍼 목사였습니다.

 

그는 미국에서의 보장된 교수 생활을 포기하고 지금 가지 않으면 전후 독일교회재건에 동참 할 자격이 없다"면서 고통받는 조국 독일로 돌아갔지만 결국 비밀경찰에 잡혀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 후 그는 39세의 나이로 전쟁 끝나기 한 달 전쯤에 교수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인 <옥중서간통해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가 무관하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통 가운데 친히 찾아 오셔서 함께 고통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동일한 시대의 고통 속에서 한 쪽에서는 '아니마민(구주가 오실것을 나는 믿는다)'을 노래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고통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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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 속에서도...

2013. 7. 30. 11:30 | Posted by 소망지기

시인 용 혜원 씨가 쓴 시중에 <비가 내린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비가 내린다/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비를 맞고 서있다//

나무는 비를 맞으면/ 더 생기가 도는데/ 우리는 왜 비를 맞으면/ 더 초라해 보일까//

그만큼 순수하지 못한 탓일까/ 그만큼 욕심이 많은 탓일까//

비가 내린다/ 왜 우리는 우산을 쓰고 있을까/ 온몸으로 이 비를 맞아도//

아무런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

 

온 몸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서있는 나무와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시작되는 시인의 자기성찰이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비를 맞으면서 자기성찰을 하기보다는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낭만의 빗줄기가 아니라 아픔과 흉측한 상처를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수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올해는 여느 해의 장마보다도 훨씬 길고 더 큰 생채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신음하며 원망하기보다는, 만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겸손의 시간으로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인물인 욥도 이와 같은 천재지변 속에서도 하늘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 중에 계신 하나님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어떤 것보다 더 큰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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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작더라도...

2013. 6. 18. 19:32 | Posted by 소망지기

한때 우리는 큰 것은 무조건 좋다는 식의 ‘점보 신드롬’에 현혹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큰 냉장고, 큰 평수의 아파트, 배기량이 큰 자동차, 등 자신의 형편과는 관계없이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큰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크고 비싼것이어야 상대적으로 뿌듯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것’들이 시련을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작은 것’에 관심을 가기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작고, 간편하고, 다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기업들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교차로에 내 걸린 아파트 분양 현수막을 보면 ‘큰 것’의 비애는 더 커 보입니다.

 

남북한의 최대 현안인 핵문제도 따지고 보면 '작은 것'에 기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아주 작은 원자의 집합체로서, 원자는 중앙의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되며 원자핵은 양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라늄과 같은 무거운 원자핵은 외부에서 중성자를 흡수하면 둘로 쪼개지는데 이를 원자핵분열이라 합니다. 이러한 핵분열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원리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라늄 1g이 핵분열 할 때 나오는 에너지는 약 1,000kw(열량)이며 이는 석탄 3톤을 태울 때 내는 열량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작은 핵분열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에 발전용 원자로나 큰 위력을 가진 핵무기로 이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의 한 사람은 자기 스승을 배반하기까지 했지요. 결국 예수님은 11명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로 말미암은 복음의 능력은 세대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까지 더욱 힘있게 전파되어 갈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큰 것’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넓고, 크고, 많고, 비싸고... 반대로 좁고, 작고, 적고, 값싸고... 현재 놓여진 상태보다 더 결정적인 조건은 누구의 손에서 사용되어 지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어린아이의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5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의 도구가 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 보다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이 시대를 열어 가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작은 것이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절망하기 보다는 작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어지길 위해 더 기도하고 헌신하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작은' 내 자신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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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제강(柔能制剛)

2013. 5. 31. 11:04 | Posted by 소망지기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하고 굳센 것을 누른다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에 대처할 때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이기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으로 대하는 것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부드러움은 굳셈을 제어하고 약한 것은 능히 강한 것을 제어하는 힘이 있습니다. 약함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강함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강한 것은 늘 약하고 부드러운 것에 무너지게 됩니다.

 

미국 콜로라도의 한 산봉우리에 400년 동안이나 자라오던 거대한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콜롬버스가 산살바도르에 상륙했을 때 그 나무는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나무였고, 청교도들이 미국에 왔을 때는 그 나무는 반쯤 자랐을 것입니다. 그 나무는 긴 세월동안 14번이나 벼락에 맞았고, 헤아릴 수 없는 눈사태와 폭풍우를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딱정벌레의 공격을 받고 그만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벌레들은 나무의 속을 파먹어 나무의 버티는 힘을 약화시켰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거센 폭풍과 벼락을 이겨온 이 거목이 아무 것도 아닌 작은 발레들에게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노자’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음을 당하고 나면 굳어지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도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게되면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그렇기에 나무가 강하면 꺾이게 된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자리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굳고 강한 것을 치는데 물보다 나은 것은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알건마는 그 이치를 실행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가 긴장되고 각박해질수록 부드러움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힘이 있다고 힘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큰 바윗돌을 들기 위해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힘 자랑을 하면서 바위를 들려고 애썼으나 모두 실패했지만 한 작은 아이가 지렛대를 이용하여 큰 힘 안들이고 바위를 옮겨 놓았다는 이야기는 ‘힘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조건 힘만 쓰는 것보다는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비록 약할지라도 능히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한 쇠라도 물 앞에서는 약해집니다. 녹이 쇠를 점점 약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강풍보다는 따스한 햇살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듯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강함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사회가 될 때 살맛 나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무런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드러움이 곧 강함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들과 만나게됩니다. 그럴때일수록 나의 감정, 나의 혈기, 나의 기질로 맞대응할게 아니라,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 곧 이기는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강한 자가 가지는 여유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낮출 때입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곧 강함입니다.

 

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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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2013. 5. 31. 10:45 | Posted by 소망지기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과 머릿속에 떠돌아 다니는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은 작으나마 쉼이요, 무거운 짐을 벗는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몇자씩 적어보기도 했었는데...

그러나 정작 이런 저런 일로 심신이 지쳐서 쉼이 필요할 때는 글이 써 지지 않더군요. 글 쓸 엄두도 안나구요.

목회의 과정이 결코 쉽거나 만만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고 없이 다가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어 내기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변호사 사무실도 다녀보고... 평생 처음 가보는 법원도 다녀보고... 지엄하신(?) 판사님 앞에서도 서보기도하고...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증인 반대신문도 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개인 일이 아닌 교회일로 송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교회이전을 하자며 건축헌금을 한 사람이 2년이 지난 다음 헌금한 돈을 다시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것도 애초부터  헌금한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가 빌려달라고 해서 무이자로 빌려 주었는데 안갚는다면서요... 차용증 한장 써 준 적도 없는데...졸지에 돈빌려 쓰고 안 갚은 사깃꾼 목사가 되었지요.

헌금 돌려달란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제가 직접 당해보기는 처음인지라 황당하고... 기가막히고... 통탄할 지경이었지요. 그것도 장로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서...   

성도들 앞에서는 그럴듯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이야기하고, 신앙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없는 이야기를 지어 만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결국, 없는 재정에 하는 수 없이 임대보증금을 빼 주기로 하고, 또다시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처없는 40년 광야와 같은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하려나 봅니다. ㅎㅎ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목회자로서 다시금 큰 책임감을 느낌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교회와 성도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한국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왜 이런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외적성장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공공연히 외치던 우리의 신앙이 이제는 세상 속에서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요 그 장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닐까요?

제대로된 신앙 훈련과 말씀의 선포가 없었기에 신앙의 변질로 인해 곳곳에서 썩고 악취가 나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의 경력과 직분만을 자랑하고,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개인주의와 세속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철저한 회개와 새로운 각성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누구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저 스스로 마음을 찟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참 복음의 회복과 삶의 변화를 위해 다시금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실망하고... 마음이 참 많이 아팠는데... 이제는 용서할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소망이 생기는군요.

 

저도 저 자신에게 기대가 생깁니다.

 

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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