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사기 1:1-10
제목 : 하나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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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교회 중심? 예배 중심? 봉사와 섬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은 다양한 은사적 기능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 사역의 중심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12절은 말씀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1.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성도를 온전한게 하여'의 주어는 11절에 소개한 여러 은사적 사역자들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사역을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헬:'고치다' '수리하다' '완성하다')하는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을 어떤 상태까지 '온전하게' 양육하고 가르쳐야 할까요?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주체는 11절의 사역자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양육된 12절의 '성도'입니다, '봉사'(헬: '디아코니아')는 '집사'('디아코노스')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서 'Ministry'(사역)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역'은 오늘날의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11절의 사역자들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봉사의 일'을 통해서 최종적인 목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구성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엡1:23, 고전12:27). 즉, 성도들은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는 '재생산'의 사역에 헌신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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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누렸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으로 변질된 모습에 바울은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인에게도 경종을 울리는데, 우리도 자칫하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우리만의 신앙'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어떤 모습에서 이처럼 안타까워하는 것일까요?
1. 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2절).
유대인들은 정말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현재도 유대인들은 음식, 절기, 문화,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지식에 따른 열심이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부터 기인한 '열심'이 아니면 무가치합니다.
2.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의 의를 세움(3절).
'의'란 '옳다'는 의미로서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의'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수고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여겨주시는 '의'마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는 무시하고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자기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보기에 좋은 것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모름(4절).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으로 인해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의'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여전히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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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사기의 주제이자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라는 대답은 정치적인 군주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왕정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신앙과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의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은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망각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라는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17:6, 18:1, 19:1, 21:25). 성경 저자는 이스라엘의 당면 문제의 원인을 '왕이 없음'에서 찾고있습니다. 이것은 힘 있는 군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2. 각자 왕이 되었습니다.
17장부터 21장까지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말로 시작과 끝이 둘러싸인 액자형식을 취합니다(참고, 17:6, 21:25).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히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 왕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세태를 고발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왕이라고 하지만 정작 삶속에서는 자신이 왕으로 사는 삶의 실장을 보여줍니다.
3. 세상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왕은 기준을 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면 그 말씀이 기준이지만, 사람마다 왕이 되면 각자의 판단과 생각이 기준이 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사기를 통해 사람이 기준 되는 사회의 적나라한 실장을 보여 주면서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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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사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태어났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다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두지 않고 회복시키는데 그 방법이 역설적입니다. 삼손은 무시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삼손을 회복시키십니다. 말씀이 무시당하는 시대에 말씀을 바르게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머리털이 밀리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이 머리컬을 미는 경우는 두가지 입니다. 부정해졌을 때와 나실인의 기한이 다 찼을 때입니다. 들릴라에 의해 멀리가 깍인 삼손은 나실인 기한을 끝내고 대시 정결케 하여 나실인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해 머리털리 밀렸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다시 회복시키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2. 두 눈이 뽑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삼손도 사사임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며 살았습니다(참고, 14:2, 16:2, 4). 육적인 눈에 보기 좋은 것만 쫒다가 정작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지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육의 눈을 뽑아냄으로써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옥에서 맷돌을 돌리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항상 좋고 높은 곳만 누리던 삼손을 가장 낮고 비참한 환경으로 끌어내린 것은 말씀에 따라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나실인의 정결 예식처럼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비참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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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여러가지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 개인의 부족함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더 급하기에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었는데도, 기드온은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역사를 이룬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드온으로 인해 사사시대는 더욱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1. 겸손을 버리고 영광을 추구합니다(24-26절).
기드온은 왕이 되어 줄 것을 거절하는 대신(참고, 22-23절) 전리품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전쟁의 대원칙인 '헤렘(진멸하다, 바치다)'을 정면에서 어기는 행위입니다. '헤렘'은 모든 전쟁의 전리품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참고, 수6:18-21). 그러나 기드온은 마치 자기 능력으로 승리한 듯이 노획물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2. 승리 뒤에 찾아온 야망이 있습니다(27절).
므낫세 지파인 기드온이 레위 지파 대제사장만이 있는 옷인 '에봇'을 만들어 '자기의 성읍'에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이 가능한 것은 당시 이방나라에서 통치권과 신을 섬기는 신권을 동시에 가지는 사람이 바로 왕인데, 기드온은 형식적인 왕권은 포기했지만 이미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3. 절제하지 못한 삶의 결과가 있습니다(30-31절).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연합체가 무너지는 시대입니다. 기드온도 미디안과 전쟁에서 4지파만 동원하여 싸웠습니다. 전국적인 세력이 없는 사사가 아내를 많이 두고 자녀 70명을 낳을 정도였고, 더욱이 첩까지 두고 그 아들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다)'이라 한 것은 기드온의 삶이 어떠했음을 적나라하게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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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쩔쩔매며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라고 푸념도 해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방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이런 관점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요?
1. 하나님을 인식하는 통로로 사용합니다(삿 2: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쫒아내지 않고 남겨둔 이유는 그들이 현실적으로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이 '가시와 율무'처럼 작용할 때는 빨리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신의 유익과 편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남겨 두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삿 2:21-22, 3:1, 4).
마귀의 시험과는 달리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단련하고 성정시킵니다. 불순종의 결과인 이방 민족의 문제를 통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족속으로 인한 삶의 안락과 편리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더 중요하고 복됨을 알게 하기 위합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어떤 유익은 결국은 불행임을 알아야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한 교육의 도구로 사용합니다(삿 3:2).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란 가나안 전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평화롭게만' 살려고 하는 '신세대'를 의미합니다. 이런 세대에 남아있는 이방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신앙을 가르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깨닫고 경험한다면, 오히려 그 문제는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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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권세(18절),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사명(19-20절 상), 예수님이 하실 일(20절 하)을 말씀하는데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요소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부흥과 선교를 위해서는 '사명'을 강조하겠지만, 내용을 보면 사명보다는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1. '대사명'은 성령세례로 인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제자 삼는'사명은 제자들의 헌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보듯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당연히 제자로 부른 목적이 불신자들을 임하심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성령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헌신의 결과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려면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예수님(18절)과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 하반절)는 내용과 연결하게 함으로써 비록 제자 중에는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17절),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자기 모습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3.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열한 제자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했을 때 성령을 받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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