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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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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고백

2022. 9. 18. 12:26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9.18.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하 23:1-7
제목 : 나의 마지막 고백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은 찾아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이 사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할 일도 아닙니다.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온 다윗이 마지막을 맞이하면서 고백하는 모습에서 우리도 어떤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함께 귀 기울여 봅시다.

1. 내가 고백하는 나(1절).
다윗은 자신을 '높이 세워진 자', '기름 부음 받은 자', '노래 잘하는 자'로 고백합니다. 자기 삶을 자수성가한 성공인으로 고백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삶임을 고백합니다. 가장 낮은 목동에서 시작해서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성취감이나 자부심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예배하며 살아온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2. 하나님이 고백하는 나(3-4절).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공의로 다스리는 자',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이게도 인간적인 약점과 허물이 많았음에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행한 어떤 업적이나 치적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단지 어떤 마음과 믿으믕로 살아왔는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결과보다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3. 삶이 고백하는 나(2절, 5절).
다윗은 자기 삶의 마지막을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확신으로 마무리합니다.(참고, 6-7절). 그 이유는 자기 삶을 '영원한 언약' 아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성령도 '말씀이 혀에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듯,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삶이 인생의 마지막을 큰 확신과 당당함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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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성장의 3가지 요소

2022. 9. 11. 12:18 | Posted by 소망지기

 

2022.9.1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6:13
제목 : 믿음 성장의 3가지 요소

 

 

어떻게 생활하면 믿음이 잘 자랄까요?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많이 하면 믿음이 자랄까요? 이런 것들은 좋은 믿음의 결과이지 수단은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본받아 흉내 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배워서 우리의 신앙에 그대로 적용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통해 믿음이 자라는데 필요한 요소를 살펴봅시다.

1. '부르사' = 지금, 여기서 시작합니다.
예쑤님은 특별한 사람 중에서 사도를 세운 것이 아니라, 평소 따르던 많은 제자 중에서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여기서(Here), 지금(Now), 이것으로(This) 시작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특별한 환경이나 상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현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이 믿음 성장에 좋은 시간입니다.

2. '택하여' = 세밀하나 부분까지 믿음의 선택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도를 택하실 때 세상적인 스펙으로 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데, 좋은 신앙이란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믿음의 선택을 하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경우는 믿음의 선택이 세밀하지 못하고 자의적이거나 원칙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바른 '선택'을 먹고 자랍니다.

3. '칭하셨으니' = 주어진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합니다.
비록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선발된 12명의 제자의 면면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믿음의 선택을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자기 주변의 크고 작은 일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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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치명적 반전

2022. 9. 4. 12:20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9.04. 주일 오전 예배
본문 : 야고보서 1:17-18
제목 : 믿는 자의 치명적 반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섬긴다는 사실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 삶의 가치나 태도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 안에서 믿는 자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반전은 이 땅의 삶은 물론이요 영원한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에 열심을 내기보다는 일어난 변화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1. 삶의 반전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와 선물(17절).
타락한 인간은 땀 흘려 수고하며 사는 형벌을 받았습니다(창3:17-19).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필요한 '은사'(헬: '도시스' = 공급, 제공)와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욕심낼 필요 없이(참고, 15절) 범사에 자족하면서 감사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2. 존재의 반전 = 피조물 중에 첫 열매(18절 상).
성경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수확물이든 첫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첫 것을 통해서 나머지 것도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의 하나인 성도를 첫 열매로 삼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를 높여 주시고 존재감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만물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감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3. 관계의 반전 = 피조물에서 자녀로(18절 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예수 그리도로 인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태어난' 하나님 자녀들입니다. '피조물'이 '자녀'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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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치명적 매력

2022. 8. 28. 12:21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8.28. 주일오전예배
본문 : 창세기 1:26-28
제목 : 믿는 자의 치명적 매력

 

 

다른 사람에게는 많은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정의를 내립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형편은 각기 다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적인 정체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도 몰랐던 나의 모습, 또는 잊혀진 나의 존재는 어떤 모습일까요?

1.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27절).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외적인 모양이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며 공유할 수 있는 성품이나 성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외적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비록 자기 모습이나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2. 나는 이미 복 받은 존재이다(28절).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복을 주었습니다. 이 복은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히 거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을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세상적인 복에 미혹되어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 나는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다(26절).
하나님은 인간 창조의 필요성을 '다스림'에 두었습니다. 이 '다스림'은 힘의 우위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다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관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해있을지라도 그 상황을 능히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어서 환경에 지배받기보다는 오히려 다스릴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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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의 치명적 착각

2022. 8. 21.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8.2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마태복음 3:5-9
제목 : 믿는 자들의 치명적 착각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순간적인 판단의 오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착각은 단순한 착오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광야와 요단강에서 사역하는 세례요한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찾아옵니다. 어쩌면 이들은 기존의 종교인들과는 다른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신랄한 책망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신앙에 대한 착각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 하나님이다'라고 착각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지 '하나님에 관한'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었기에 세례 요한은 광야와 요단강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바울은 이방 나라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2. 무리에 대한 착각
자신의 틀을 버리지 않고 '무리' 속에 머물러 있다고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요단강에 세례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단순한 '이동'에 불과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한 것은 단순히 무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동'은 '변화'가 아닙니다.

3. 구원에 대한 착각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구원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참고, 눅19:9). 이 구원은 혈통이나 종교적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이미 받은 성도는 구원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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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쟁

2022. 8. 14. 12:1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8.1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사기 1:1-10
제목 : 하나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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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자의 치명적 오해

2022. 8. 7. 12:22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8.07. 주일오전예배
본문 : 에베소서 4:11-12
제목 : 믿는 자의 치명적 오해

 

 

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교회 중심? 예배 중심? 봉사와 섬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은 다양한 은사적 기능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 사역의 중심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12절은 말씀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1.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성도를 온전한게 하여'의 주어는 11절에 소개한 여러 은사적 사역자들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사역을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헬:'고치다' '수리하다' '완성하다')하는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을 어떤 상태까지 '온전하게' 양육하고 가르쳐야 할까요?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주체는 11절의 사역자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양육된 12절의 '성도'입니다, '봉사'(헬: '디아코니아')는 '집사'('디아코노스')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서 'Ministry'(사역)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역'은 오늘날의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11절의 사역자들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봉사의 일'을 통해서 최종적인 목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구성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엡1:23, 고전12:27). 즉, 성도들은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는 '재생산'의 사역에 헌신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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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치명적 실수

2022. 7. 31. 12:24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7.31. 주일 오전 예배
본문 : 로마서 10:1-4
제목 : 믿는 자의 치명적 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누렸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으로 변질된 모습에 바울은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인에게도 경종을 울리는데, 우리도 자칫하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우리만의 신앙'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어떤 모습에서 이처럼 안타까워하는 것일까요?

1. 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2절).
유대인들은 정말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현재도 유대인들은 음식, 절기, 문화,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지식에 따른 열심이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부터 기인한 '열심'이 아니면 무가치합니다.

2.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의 의를 세움(3절).
'의'란 '옳다'는 의미로서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의'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수고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여겨주시는 '의'마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는 무시하고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자기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보기에 좋은 것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모름(4절).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으로 인해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의'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여전히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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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인가?

2022. 7. 24.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7.2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사기 21:25
제목 : 누가 왕인가?

 

 

오늘 본문은 사사기의 주제이자 결론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라는 대답은 정치적인 군주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왕정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신앙과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의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은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망각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라는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17:6, 18:1, 19:1, 21:25). 성경 저자는 이스라엘의 당면 문제의 원인을 '왕이 없음'에서 찾고있습니다. 이것은 힘 있는 군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2.  각자 왕이 되었습니다.
17장부터 21장까지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말로 시작과 끝이 둘러싸인 액자형식을 취합니다(참고, 17:6, 21:25).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히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 왕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세태를 고발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왕이라고 하지만 정작 삶속에서는 자신이 왕으로 사는 삶의 실장을 보여줍니다.

3. 세상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왕은 기준을 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면 그 말씀이 기준이지만, 사람마다 왕이 되면 각자의 판단과 생각이 기준이 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사기를 통해 사람이 기준 되는 사회의 적나라한 실장을 보여 주면서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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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회복

2022. 7. 17. 12:23 | Posted by 소망지기

 

2022.07.17.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사기 16:19-22
제목 : 비참한 회복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사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태어났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다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을 그냥 두지 않고 회복시키는데 그 방법이 역설적입니다. 삼손은 무시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삼손을 회복시키십니다. 말씀이 무시당하는 시대에 말씀을 바르게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머리털이 밀리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이 머리컬을 미는 경우는 두가지 입니다. 부정해졌을 때와 나실인의 기한이 다 찼을 때입니다. 들릴라에 의해 멀리가 깍인 삼손은 나실인 기한을 끝내고 대시 정결케 하여 나실인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해 머리털리 밀렸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다시 회복시키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2. 두 눈이 뽑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삼손도 사사임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며 살았습니다(참고, 14:2, 16:2, 4). 육적인 눈에 보기 좋은 것만 쫒다가 정작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지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육의 눈을 뽑아냄으로써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옥에서 맷돌을 돌리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항상 좋고 높은 곳만 누리던 삼손을 가장 낮고 비참한 환경으로 끌어내린 것은 말씀에 따라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나실인의 정결 예식처럼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비참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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