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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사람을 세우실까?

2021. 11. 7. 12:25 | Posted by 소망지기

 

2021.11.07.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사기 12:8-15
제목 : 왜 이런 사람을 세우실까?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면 선한 지도자나 악한 지도자나 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악한 자를 지도자로 삼아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선한 왕보다는 악한 왕이 많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국가나 교회나 가정에서 하나님이 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용인술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 본문에 대한 설명.
사사는 왕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재판하고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이런 사사를 하나님이 세울때에는 어느정도 검증이 된 사람을 세울텐데 이들이 행한 업적을 보면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실무나 오류로 여길 수 있으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용인술이 담겨져 있습니다.

2. 약한자를 세우시는 하나님.
세상에는 가장 뛰어나고 능력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지도자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지도자가 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나 부족한 자를 세웁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어떤 능력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은 약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세웁니다.

3. 능력은 주시고, 실력은 요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택한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권위와 능력을 부어줍니다. 여기에 합당한 수고와 노력으로 만든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의 몫입니다. 잘못된 지도자가 비난 받아야 할 점은 하나님이 주신 지위에 합당하나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비난은 하나님을 향할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는 그들 자신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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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나실인으로 사는 법

2021. 10. 31. 12:42 | Posted by 소망지기

 

2021.10.3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민수기 6:1-8
제목 : 21세기 나실인으로 사는 법

 나실인(히: '나지르')이란 '나자르(=구별하다, 성별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께 서원이 있거나 특별한 헌시을 위해 자기의 삶을 구별하여 드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되었는데 또다시 헌신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불필요하게 여길 수 있으나 하나님이 특별하게 나실인의 규례를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21세기의 성도들에게 나실인의 의미와 삶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누구나 자원할 수 있습니다(2절).
나실인의 자격이 '남자나 여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나실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실인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나 믿음 좋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비록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지 못한다하더라도(참고, 9-12절)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믿음과 생활을 거룩하게 구별하려는 헌신의 마음입니다.

2. 자신이 정한 기간 동안 이루어집니다(4, 5, 6, 8절).
대표적인 나실인인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실인으로 헌신한다는 것이 큰 부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을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들이고,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정한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형편과 상황에 따라 스스로 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삶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의 시간입니다.

3. 정해진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3, 5, 6절)
나실인으로 헌신하는 것에는 분명한 규례가 있습니다. 포도류를 먹지 않는 다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까지 절제하며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이고, 머리를 깍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고백이며, 시체를 만지지 않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을 멀리하는 것으로 죄로부터 멀어진다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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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나님을 믿나요?

2021. 10. 24. 12:40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10. 24.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17:27-31
제목 : 이런 하나님을 믿나요?

바울 일행은 에게해를 건너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의 아덴(아테네)에 이르렀습니다. 아덴은 학문의 도시요, 당시 가장 세속적이면서 다양한 종교적 성향이 있는 곳으로서 마치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시대상과 흡사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복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탁월한 지성과 고도의 과학 문명이 발달한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복음을 바울을 통해 알아봅시다.

1.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27-28절 상).
하나님을 막연히 '저기'계신 분으로 여겨 자신과 관계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다가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기'계신 분으로서 우리의 작은 수고로도 능히 만날 수 있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성과 학문이 발전한 사회일수록 하나님에 대한 더욱 깊은 영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친밀하신 하나님(28절 하-29절).
'신의 소생'은 당시 황제나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신의 '이미지'로 만족했다면, 모든 사람을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이미지'가 아닌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어떤 논리나 이론은 설명하거나 해석하기보다는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이신 예수(30-31절).
바울이 학문과 종교의 도시인 아덴에서 전한 것은 오직 예수와 그의 부활이었습니다(참고, 18절).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예리한 지성과 풍부한 종교성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증거를 주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와 그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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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건너야 할 강

2021. 10. 17. 12:42 | Posted by 소망지기

2021.10.17.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16:6-10
제목 : 내가 건너야 할 강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 욕정으로 살던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익숙하던 삶을 넘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믿음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귀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건넜던 중요한 의미의 세 강이 있는데, 이 강을 건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보고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믿음으로 건너 더 아름다운 믿음의 인생으로 만들어 갑시다.

1. 홍해(은혜의 강).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로막은 첫 장애물이 홍해입니다. 그러나 진퇴양난의 위기속에도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때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머무르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분주함을 멈추고 침묵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할 때 또 다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요단강(믿음의 강).
40년의 방황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마자 강이 갈라졌다는 것은 믿음의 순종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고 손해인 것처럼 보일지리도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에게해(성령의 강).
바울은 계획한 대로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지만, 성령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환상을 통해, 에게해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계쇡에 없던 유럽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꿉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나 방법보다는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영감에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강은 우리의 한계를 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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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로마서를 설교하다

2021. 10. 10. 12:45 | Posted by 소망지기

2021.10.10. 주일 오전 예배
본문 : 로마서 10:1-4
제목 : 욥이 로마서를 설교하다

족장시대에 살던 욥은 바울보다 2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기와 로마서는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욥에게 엘리후가 그랬듯이, 바울은 나름 믿음 좋다고하는 로마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는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욥의 관점에서 읽는 로마서는 어떤 감동이 있을까요?

1. 잘못된 지식.
로마교회는 예수를 믿는 이방인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따라 예수님을 믿다보니 정작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신앙이 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못된 지식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음을 상기시키면서 바른 신앙을 위한 바른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잘못된 열심.
욥의 경우처럼, 로마 교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열심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눈에는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헌신이 아니라, 종교적인 열심으로 자기 만족감이나 성취감으로 만족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마치 욥에게 엘리후가 권면하듯, 바울은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잘못된 열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 잘못된 의.
이들이 보여주는 종교적 열심과 열정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만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욥처럼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신비로운 '복음'을 자기 만족과 교인들에게 전하니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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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5)

2021. 10. 3. 12:47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10. 03.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42:12-17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5)

하나님의 '의'으로 변화된 욥의 신앙과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욥기 1장과 2장을 통해 고난받기 전의 욥의 신앙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욥의 신앙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오히려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때 '종교인'으로 살던 욥이 '의인'으로 변화된 모습을 소개하는 본문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1. 의인은 삶을 통해 믿음을 드러냅니다.
고난을 통해 신앙의 문제점을 깨닫고 회개한 욥은 더 많은 기도와 예배, 그리고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 신앙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종교인에게는 종교적 행위가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의 의인에게는 삶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삶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2. 의인은 인내로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갑절의 축복'은 욥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누리게 된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즉, 한순간에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동안 조금씩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길고 지난한 여정 속에서 욥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깊은 은혜의 관계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것을 "욥의 인내"(약5:11)라고 했습니다.

3. 의인은 성숙한 성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창세기의 족장시대가 생활의 배경인 욥에게 아들이 아닌 딸에 관해 상세히 기록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고난 받기 전의 욥의 관심은 아들들이었지만, 믿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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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4)

2021. 9. 26. 12:49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9.2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5:1-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4)

욥의 세친구들은 욥이 당면한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애썼던것에 비해, 엘리후는 욥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삶의 문제를 대하는 관점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현실문제에 휘말려서 영적인 부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오늘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 봅시다.

1. 욥의 신앙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요?
33장에서 하나님의 대속물을 통한 '의'를 설명한 후, 욥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의임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어떤 선행이나 악행들도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가 받은 믿음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2. 종교인이 아니니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1장과 2장에 묘사된 욥의 신앙의 행위가 자신의 '의'가 된다면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정당성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의를 누린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하나님과 감사와 찬양으로 더 깊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의로 사는 모습은?
삼상12:19-25을 보면 왕을 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하여 회개하는데, 왕을 폐하고 다시 사사시대로 돌아가기 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꼐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니면 종교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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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2021. 9. 19. 12:48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9.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23-2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이 고난 속엥서 형통함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든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가진 잘못된 믿음(의)과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을 비교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됐는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도 함께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 '의'란 무엇인가?
'의(히:쩨테크)'란 '바르다'. '옳다', '공평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크게 두가지로 사용되는데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관습적 가치를 따르는 행위를 지칭하거나, 신앙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의'의 주체가 사람이고 근거가 공동체의 가치관에 기원하면 '도덕적 의', 하나님에게 기원하면 '구원사적 의'라고 합니다.

2. 욥이 가진 의.
엘리후가 진단하는 욥의 문제는 '신앙문제'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욥 32:1)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욥이 주장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와 다름을 설명해 나갑니다. 욥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드린 행위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도덕적, 관습적 의'에 불과하다며 일축합니다.

3.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비유를 들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사자의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대속물'을 통하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에 있습니다(24절).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의 어떤 수고나 노력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친밀'해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뻐할 때 공의(의:'째테크')가 회복되게 됩니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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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2021. 9. 12. 12:47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2.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13-1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예기치 못한 삶의 환난이 닥쳐오면 혼란과 두려움이 휩싸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사건 자체에 있기보다는 당사자인 우리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평온할 때 정성껏 예배드리는 삶만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한결핟은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믿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욥에게 있는 문제는?
엘리후가 지적하는 욥의 문제는 자신은 깨끗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준것에 불평하고 있습니다(33:8-11절, 34:5-6). 그 결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합니다(34:9, 35:3). 욥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황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엘리후가 전하는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2.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말씀합니다(13-14절).
욥은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의 의도에는 무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크기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형편을 '알리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서툰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3. 하나님은 고난도 도구로 사용합니다(15-18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왜(why)'라고 하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what)'라고 한다면 항상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영광받기 위해 자신을 시험했음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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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2021. 9. 5. 12:42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9.05.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32:11-16
제목: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욥기는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나 욕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욕기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엘리후입니다. 삶의 문제 앞에서 시음하는 욥이나 이를 바라보며 권면하고 있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믿는 하나님과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치구들이 믿는 하나님.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찾아와 권면하는 엘리바스가 믿는 하나님은 심으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입니다(욥4:7-8). 빌닷이 믿는 하나님은 역사와 전통을 통해 경험된 하나님입니다(요8:8-10). 소발이 믿는 하나님은 철저한 계명에 따라 복도 주고 심판도 하는 교리적이고 원칙주의적인 하나님입니다(욥11:13-19).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주장을 옳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욥42:7-9).

2. 욥이 믿는 하나님.
욥기 1장에서 보여주는 욥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할 정도로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1:8, 2:3). 그러나 욥이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바른 신앙으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을 향해 '생각을 어둡게 하는자(38:2)', '하나님을 탓하는자(40:2)'라고 불렀습니다.

3.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엘리후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중에 발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문제를 해석하기에 급급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집중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논리'나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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