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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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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5)

2021. 10. 3. 12:47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10. 03.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42:12-17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5)

하나님의 '의'으로 변화된 욥의 신앙과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욥기 1장과 2장을 통해 고난받기 전의 욥의 신앙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욥의 신앙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오히려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때 '종교인'으로 살던 욥이 '의인'으로 변화된 모습을 소개하는 본문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1. 의인은 삶을 통해 믿음을 드러냅니다.
고난을 통해 신앙의 문제점을 깨닫고 회개한 욥은 더 많은 기도와 예배, 그리고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 신앙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종교인에게는 종교적 행위가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의 의인에게는 삶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삶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2. 의인은 인내로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갑절의 축복'은 욥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누리게 된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즉, 한순간에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동안 조금씩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길고 지난한 여정 속에서 욥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깊은 은혜의 관계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것을 "욥의 인내"(약5:11)라고 했습니다.

3. 의인은 성숙한 성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창세기의 족장시대가 생활의 배경인 욥에게 아들이 아닌 딸에 관해 상세히 기록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고난 받기 전의 욥의 관심은 아들들이었지만, 믿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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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4)

2021. 9. 26. 12:49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9.26.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5:1-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4)

욥의 세친구들은 욥이 당면한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애썼던것에 비해, 엘리후는 욥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삶의 문제를 대하는 관점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현실문제에 휘말려서 영적인 부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오늘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 봅시다.

1. 욥의 신앙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요?
33장에서 하나님의 대속물을 통한 '의'를 설명한 후, 욥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의임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어떤 선행이나 악행들도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가 받은 믿음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2. 종교인이 아니니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1장과 2장에 묘사된 욥의 신앙의 행위가 자신의 '의'가 된다면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정당성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의를 누린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하나님과 감사와 찬양으로 더 깊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의로 사는 모습은?
삼상12:19-25을 보면 왕을 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하여 회개하는데, 왕을 폐하고 다시 사사시대로 돌아가기 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꼐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니면 종교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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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2021. 9. 19. 12:48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9.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23-2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3)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이 고난 속엥서 형통함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든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가진 잘못된 믿음(의)과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을 비교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됐는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신앙도 함께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 '의'란 무엇인가?
'의(히:쩨테크)'란 '바르다'. '옳다', '공평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크게 두가지로 사용되는데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관습적 가치를 따르는 행위를 지칭하거나, 신앙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의'의 주체가 사람이고 근거가 공동체의 가치관에 기원하면 '도덕적 의', 하나님에게 기원하면 '구원사적 의'라고 합니다.

2. 욥이 가진 의.
엘리후가 진단하는 욥의 문제는 '신앙문제'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욥 32:1)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욥이 주장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와 다름을 설명해 나갑니다. 욥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드린 행위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도덕적, 관습적 의'에 불과하다며 일축합니다.

3.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비유를 들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당사자의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대속물'을 통하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에 있습니다(24절).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의 어떤 수고나 노력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친밀'해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뻐할 때 공의(의:'째테크')가 회복되게 됩니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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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2021. 9. 12. 12:47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9. 12. 주일오전예배
본문 : 욥기 33:13-18
제목 :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2)

예기치 못한 삶의 환난이 닥쳐오면 혼란과 두려움이 휩싸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사건 자체에 있기보다는 당사자인 우리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평온할 때 정성껏 예배드리는 삶만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한결핟은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믿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욥에게 있는 문제는?
엘리후가 지적하는 욥의 문제는 자신은 깨끗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준것에 불평하고 있습니다(33:8-11절, 34:5-6). 그 결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합니다(34:9, 35:3). 욥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황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엘리후가 전하는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2.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말씀합니다(13-14절).
욥은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의 의도에는 무심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크기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형편을 '알리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서툰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3. 하나님은 고난도 도구로 사용합니다(15-18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왜(why)'라고 하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what)'라고 한다면 항상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영광받기 위해 자신을 시험했음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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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2021. 9. 5. 12:42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9.05. 주일오전예배
본문: 욥기 32:11-16
제목: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1)

 

 

욥기는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나 욕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욕기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엘리후입니다. 삶의 문제 앞에서 시음하는 욥이나 이를 바라보며 권면하고 있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믿는 하나님과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치구들이 믿는 하나님.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찾아와 권면하는 엘리바스가 믿는 하나님은 심으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입니다(욥4:7-8). 빌닷이 믿는 하나님은 역사와 전통을 통해 경험된 하나님입니다(요8:8-10). 소발이 믿는 하나님은 철저한 계명에 따라 복도 주고 심판도 하는 교리적이고 원칙주의적인 하나님입니다(욥11:13-19).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주장을 옳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욥42:7-9).

2. 욥이 믿는 하나님.
욥기 1장에서 보여주는 욥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할 정도로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1:8, 2:3). 그러나 욥이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바른 신앙으로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을 향해 '생각을 어둡게 하는자(38:2)', '하나님을 탓하는자(40:2)'라고 불렀습니다.

3. 엘리후가 믿는 하나님.
엘리후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중에 발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문제를 해석하기에 급급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집중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논리'나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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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29. 12:44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8. 29. 주일오전예배
본문: 빌립보서 2:5-11
제목: 성도 안에 있는 불신앙

 

 

참신앙이냐 불신앙이냐의 기준은 하나님과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앙만이 참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이 비록 성경에서 말하는 모습을 갖추지 못해 아직은 부족하고 연약한 상태라면 이것 역시 '불신앙'입니다. 신앙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중심으로 쳥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라면 어떤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삶을 통해 알아봅시다.

1. 마음이 아니라 성품입니다(5절).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 또는 감정적인 동감의 느낌이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이어받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참고, 벧후1:4). 그래서 우리를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2. 채움이 아니라 비움입니다(6-8절)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위해 많은 것을 비우셨고, 비움의 결과는 고난과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비움을 경험케하는 것은 결핍과 약함을 통해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임하는 고난의 시간은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을 펼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3. 자기만족이 아닌 영향력입니다(9-11절).
신앙은 자기만 예수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인한 '영향력'이 생겨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신앙이 전염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력이 없는 신앙은 곧 불신앙이요 가짜신앙입니다. 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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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22.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21. 08. 22. 주일 오전 예배
본문: 누가복음 10:17-20
제목: 전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모든 믿는 자들이 공통으로 받은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특별한 사역자나 은사자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진 전도의 개념과 우리가 가진 전도의 개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발견하고 바른 전도자의 신앙으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하고, 그러나 큰 영적인 의미가 있는 특별한 사역입니다.

1. 전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17절).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전도'와 '가르침'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이나(마9:35) 제자들의 사역(행5:42)을 보면 전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말씀을 이해시켜 믿음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믿는자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바른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2. 전도는 영적 전쟁입니다(18-19절).
칠십 인들은 전도사역을 통해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기뻐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전도는 한 사람의 교인을 더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와 매임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통하여 영적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고, 육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사탄을 제압하고 승리를 맛보는 일입니다.

3. 전도는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20절).
전도는 전도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리자요(16절). 전도는 생명책에 전도자의 이름이 기록되는 의미있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20절). 전도자는 사탄을 상대로 하는 영적 전쟁의 승리자이기에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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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15. 12:49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15.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8:4-7
제목 : 직분자 안에 있는 불신앙

직분은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호칭도 아니고, 충성스럽게 교회 기관을 섬기는 봉사자의 의미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세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구제 사역을 위해 세워진 일곱 집사(참고, 행6:1-4)중에서 스데반과 빌립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직분자들이 깨닫고 본받아야 할 귀한 교훈입니다. 성경적인 직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일이 아닌 하나님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 안에 있는 직책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들이 직분자입니다. 이런 직분자의 특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특정한 일을 위해 세웠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항상 주어진 일보다는 일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받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구제사역을 위해 세워진 빌립은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사마리아로(5절), 광야로(26절) 흩어져야 했지만 불평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합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받는 일꾼이기에 환경의 변화나 사역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3. 복음전파를 위해 세워진 사람입니다.
직분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 교회나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주어진 봉사의 일을 통해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자신이 가진 직분이나 주어진 일을 잘 행함으로 인한 보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 예수님을 전한 것으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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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8.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08. 주일오전예배 
본문 : 사무엘상 13:8-14
제목 : 예배자 안에 있는 불신앙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예배에서 비대면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자칫 소홀해지거나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각자의 예배생활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앞서 드린 제사 속에 들어있는 불신앙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람중심의 예배(11절).
스스로 제사지낸 이유를 묻는 사무엘에게 대답하는 11절을 보면 "백성은... 당신은... 불레셋 사람은..."이라며 예배의 이유를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여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하나님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자기 목적을 위한 예배(12절).
12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블레셋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도움을 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울이 드린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케 합니다. 예배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예배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3. 타성에 사로잡신 예배(13-14절).
사울왕에게 임한 저주는 사무엘이 인도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렸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진노한 이유를 14절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의 행위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후에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13:22)인 다윗을 세우는 것을 보면 예배는 형식이 아닌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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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2021. 8. 1. 12:44 | Posted by 소망지기

2021.08.01. 주일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5:15-16
제목 : 기도자 안에 있는 불신앙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많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따르며 인기(?)와 명성(?)을 쌓고 있습니다. 특별한 은혜나 능력을 필요치 않은 예수님이 틈틈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기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평소 우리가 열심히 드리는 기도에 대한 또다른 모습을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보면서 바른 기도의 영성을 회복합시다.

1.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나님이시기에 기도를 통해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틈날 때마다 기도하셨을까요? 기도는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고, 이런 관계속에서 여러가지 문제해결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창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 회복됨을 보여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로써 외국어로 말씀을 전함으로 인해 통역을 필요로 하는 방언(고전14장)과 외국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기도(행2:3-4)를 분명히 구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일을 통해 구한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