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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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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他者) 앞에 서기

2019. 5. 5. 15:1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05. 주일 오전예배

마가복음 10:17-22


 

믿음과 믿음생활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믿음'이라면 '믿음생활'은 주변 사람들 속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활동하는'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는 성공했지만 믿음생활에서 실패해서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부자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지만, 예수님 앞에서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1. '절대 타자(他者, Other)' 앞에 서기.
'타자'란 나와 전혀 다른 존재를 말합니다. '절대 타자'란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진 하나님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이나 생각 이상의 초월적인 분이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경외심과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 타자(他者, Other) 앞에 서기.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시듯 '믿음'은 나와 다른 사람('타자')앞에 서게 합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눈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타자'는 믿음의 활력소입니다.

3. 타아(他我) 앞에 서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또 다른 타자가 자기 자신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잘못된 자아인식 때문에 비극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알고있는 자신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시는 모습은 분명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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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로 살아라

2019. 4. 28. 15:1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28.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15:3-4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해석해 주면서 말쓰대로 부활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했음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부활을 어떻게 믿었고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구약의 대표적인 신앙인들을 통해 부활신앙의 실체를 살펴봅시다.

1. 아브라함의 부활신앙(히 11:17-19).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시허에서 '아들이냐? 하나님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활신앙이란 하나님만 붙잡으면 죽어도 죽는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모세의 부활신앙(눅 20:37-38).
죽은자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40년 동안 도망자로 광야에서 양치기하던 모세를 부르던 하나니의 음성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으로 하나님 안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이에 모세는 두려움과 패배감과 자기경험을 내려놓고 새롭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합니다.

3. 다윗의 부활신앙(행 2:24-28).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는 시편 16편의 다윗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다윗은 고통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희망에 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부활신앙이란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희망을 보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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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읽어라

2019. 4. 21. 15:1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2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4:44-49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엣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되새기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명되었고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했지만, 사람들은 밎지 않았습니다. 2000년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밎지 않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줄까요?

1. 예수 부활의 상황적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며칠 후에 즉시로 공식화되었고 편지형태로 전파되기 사작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이름이 공공연하게 거론하며 증언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이름이 공공연하게 거론하며 증언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뿐만 아니라 배척하던 사람들의 삶도 급격하게 변화되어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당할 정도였습니다. 과연 거짓되고 꾸며낸 일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을까요?

2. 예수 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주 제자에게 성경으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주었고(눅 24:25-27),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면서 자신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성경인 구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을까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 부활의 삶의 증거
구약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다시 오실 예수님도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성경읽기나 내용에 대한 공부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그 뜻을 이해하여 순종하는 삶이 부활의 증인이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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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일상으로

2019. 4. 14. 15:1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14.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4:1-3


 

예수님의 무덤은 있지만, 그 속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흔적만 남은 그분의 무덤에 아무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저 빈 무덤일 뿐, 관심 밖의 일이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찾기보다는 죽은 예수님을 찾고, 그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예배합니까? 살아나신 예수님을 예배합니까?

1. 무덤을 찾는 사람들.
유대인에게는 시체나 무덤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민19:16). 신성모독의 죄명을 쓰고 십자가형를 받은 예수님의 경우는 더욱 부정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은 무덤을 찾아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의 눈을 피해 장례의식을 행하려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은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닐까요?

2. 무덤을 교회로 만드는 사람들.
중세시대에는 교회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 놓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시란 날 때면 언제든지 교회로 오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님을 위해 예물을 가져오면 복을 받는다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묻히는게 영광이라고 홍보했습니다. 이런 교회 모습은 예수님의 무덤이 아닐까요?

3. 무덤에서 일상으로 가신 예수.
죽으신 예수님은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의 길에(눅25:15), 제자들이 모인 방에(요20장), 고기잡이하는 갈릴리에(요21장), 갈릴리의 산에(마28:16), 예루살렘의 감람산에(행1장) 나타나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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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복음

2019. 4. 7. 15:22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4. 07.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6:2


 

'질서'가 다소의 개인적인 불편을 감수하면서 공공의 편리와 유익을 만드는 것처럼,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불편을 감수케 하여 하나님 나라의 규범을 세웁니다. 복음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익숙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복으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1. 복음은 우리의 일상을 불편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낮아져라' '섬겨라' '용서하라' '회개하라' 등, 우리의 일상과는 다른 삶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기쁘게 하려고 어떤 불편도 감수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희생이나 불편함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당연한 변화입니다.

2. 복음은 우리의 관계를 불편하게 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삶은 모든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등, 그동안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바뀌면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뀝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생각들이 점점 불편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게 합니다.

3.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의 형상과 삶을 닮아가도록 끊임없이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결국 우리의 성품과 인격의 변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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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시작으로 만드는 복음

2019. 3. 31. 15:19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3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23:39-43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내용은 평소에는 아무렇게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마27:44)와 마가(막15:32)와는 달리 누가가 한 행악자의 이러한 변화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1. 가장 흉악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로마시대에 십자가형을 받는 '강도' 또는 '행악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당시의 법으로는 중죄인으로 사형에 합당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우리에게 천국 백성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 가장 비참한 상황을 가장 행복한 상황으로.
법치주의를 지향하던 로마는 피지배 국가에는 관대하게 대하지만 법을 어기면 가장 혹독한 처벌을 공개적으로 하기위해 만든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에서도 십자가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신21:23).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 바꿔집니다.

3.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예수님과 두 행악자는 가장 고통스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인생의 가장 마지막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한 행악자에게 주어진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절망적인 육신의 세계에서 영원한 세계로 옮겨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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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흙을 밟고

2019. 3. 24. 15:0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24. 주일 오전예배

열왕기하 5:15-19


 

북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히던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나병이 들었을 때 앨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신앙에서는 문제를 해결 받는 과정도 중요하고 의미 있지만 정작 해결 받은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1. 가치관의 변화(15-16절).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나아만은 다시 앨리사에게 와서 믿음을 고백하고 예물을 드리려합니다. 그러나 앨리사는 정중히 거절하는(16절) 반면에 사환인 게하시는 당당히 요구합니다(22절). 이런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게하시는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엘리사는 물질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거짓된 가치관을 가진 게하시를 심판하십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세계관의 변화(17절).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을 싣고 가겠다고 하는 이유는 비록 자신이 아람에서 살아가지만, 이스라엘 땅의 흙을 밟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고백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온 땅에 계시기에 자기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 나라임을 고백하고 예배하겠다는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3. 인생관의 변화(18절).
아람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자신은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을 수행하겠지만 이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어진 직무를 감당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신앙이란 세상을 떠나 종교적 행위에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직무를 충실히 감당하지만, 그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는 새로운 인생관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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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진 이유

2019. 3. 17. 15:1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17.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3:13-15


 

하나님이 그 시대의 영적상태를 판단하는 '영적지표'가 있는데 바로 신앙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그 시대의 신앙 상태를 반영하기에 예수님도 당시의 신앙의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행태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마23:36, 38).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바른 신앙의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세속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마 23장을 보면 바른 신앙으로 인도해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보이는 행태는 세상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행함이 없고(3-4절), 자기를 앞세우고(5-10절), 물질적이며(16-23절), 외식적이며(25-28절), 자기 과시적인(29-30절)모습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삶입니다.

2. 종교생활에서 자아회복으로.
당시 지도자들이 강조한 것은 종교적 헌신과 열심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은 희생시키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열심인 삶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아회복과 계발, 그리고 자기성장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장 가치있게 살 수 있는 길이 신앙 안에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3. 자기성취에서 자기성숙으로.
당시 지도자들이 추구했던 것이 '랍비' '아버지' '지도자'와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은 자기 뜻을 이루는 '자기성취'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자기성숙'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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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하나님을 죽여라

2019. 3. 10. 15: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10. 주일 오전예배

에스겔 11:14-20


 

사람의 입맛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요리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양념을 쳐서 먹을 때야 맛있다고 느낍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고'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결국,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상'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단호히 죽여버려야 합니다.

1. 철학자 니체(1844~1900)가 "신은 죽었다"고 말해야 할 이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던 니체는 신학을 포기하고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과 유럽의 정신을 지배하던 전통적인 신학과 신관에 대항합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당하여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포기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 믿는 그런 하나님은 죽고 없어졌다. 그런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라'고 외쳤습니다. 니체는 결코 허무주의나 무신론주의가 아니라 참된 인간성의 회복을 외쳤습니다.

2.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가짜일 수도 있다.
에스겔(B.C. 592)이 환상 중에 본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우상으로 가득합니다(겔 8:3-16).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우상임을 모르고 아전인수격으로 현실을 해석합니다(3절, 15절). 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B.C. 586). 이는 하나님이 친히 '가짜 하나님'을 죽여버린 결과입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믿어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은 장소나 형식에 매여있는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성소가 되십니다(16절). 그리고 환난을 통하여('그리고 가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제거하여') 새 사람을 만들어('한 마음과 새 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현실의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결국 신양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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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과 지옥

2019. 3. 3. 15:2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3. 03.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0:1-1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크게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지배하심 속에 있는 '천국'과 그렇지 못한 '지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목표는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말씀하는데 '집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포도원 '집 주인'을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모습과 그렇지 못한 지옥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1. 천국은 '은혜로운 곳'입니다.

'품꾼'이란 일정한 직장 없이 그날 일하는 사람입니다. 집주인으로서는 품꾼을 고용하여 그날의 삯을 주는 것은 일거리가 없던 품꾼들에게 베푼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품꾼들에게 임한 이 '은혜'가 다른 시간에 와서 일한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참고, 11-12절).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원함이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곳입니다,

2. 천국은 '사랑하는 곳'입니다.

'집주인'이 보여주는 행위는 일거리가 없는 품꾼들을 불쌍히 여겨 일거리를 주고, 그들에게 약속한 일당을 공평하게 지급하는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천국이 '집주인'과 같다는 것은 이러한 '사랑하는' 행위가 있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오늘날은 '사랑받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사랑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집주인'의 뜻은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우선은 각 시간에 인력시장에 나가 품꾼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한 품꾼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집주인의 뜻에 순종하여 포도원에서 일하였습니다. 두번째는 일당을 줄 때 '나중 온 자부터'주었습니다. 이것이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는 불평의 이유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주인의 뜻이듯, 천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