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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클레시아다

2019. 9. 22. 14:5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22.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9:10-19

 

'에클레시아'란 로마시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정치적, 사회적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참고, 행19:39, 41). 이런 세속적인 용어를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공동체의 이름인 동시에 이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참고, 고전 1:2).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를 통해 개인적인에클레시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교인'들의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1. 아나니아의 코뮤니타스
'코뮤니타스'란 '소통', '교제', '공동체'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나니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가려는 원수와 같은 사울을 향해 '형제 사울아'하며 예수님의 뜻을 이룹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도 깊은 영적 친밀함으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2. 아나니아의 이뮤니타스
'이뮤니타스'란 세상의 유혹이나 방해에 대한 면역과 내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내용은 아나니아가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계획(11-12절, 15-16절)을 듣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모든 미혹과 방해를 극복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3. 아나니아의 미니스트라리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났듯이 직접 사울의 눈을 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나니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계획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편견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헌신의 삶이 곧 '섬김'입니다. 그래서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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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2019. 9. 15.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15.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창세기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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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

2019. 9. 8. 13: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08.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요한일서 1:1-4

 

다니엘과 요나, 그리고 지난 중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신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인 신앙공동체와는 전혀 다르게 각 사람들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리스 도시국가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정치적, 사회적 용어입니다. 이 용어를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코뮤니타스(Communitas)
그리스 도시국가의 에클레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른 의사결정을 위한 소통과 결정된 사항에 대한 빠른 실행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 신앙을 서로 공유하고, 이 복음을 더 많은 불신자에게 전하기 위해 가정단위의 에클레시아에서 말씀, 예배, 기도, 교제 등을 통한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2. 이뮤니타스(Immunitas)
'Immune'이란 단어가 '면역'이란 의미이듯,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클레시아'를 통해 세상의 미혹에 휩쓸리지 않고 이단사상이나 타종교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확고한 신앙훈련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복음과 확고한 신앙관으로 무장하는데 게으르지 않고 '훈련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3. 미니스트라리(Ministrari)
'섬김'의 사역입니다. 다른 신앙공동체와는 달리 예수님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듯이(마20:28),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클레시아'에서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서로 섬기는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려 했습니다. 여러가지 직분과 은사적 사역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기능적 차이뿐 그 목적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성경적인 '에클레시아'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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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맞짱뜨시다!

2019. 9. 1. 12: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9. 01.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누가복음 7:48-50

 

 

바벨론에서의 다니엘과 니느웨에서의 요나를 통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셨을까요? 단순히 천국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득권자들이 가진 신앙관과 가치관과 부딪치면서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입니다.

1. 종교적, 사회적 관습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여성의 사회적 평가는 아주 낮았습니다. 남자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없었고, 사람의 수에도 들지 못하고, 법정에서 증인의 자격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인'인 여자는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죄인 여인'의 헌신을 기꺼이 받고 죄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기준들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라면 기꺼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2. 세상을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장에 의해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행하는 죄사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으로 자신들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 관습과 상관없이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성전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믿음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3. 종교적 의무를 사랑을 바꾸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을 이용하여 '죄인'을 만들어 정죄놀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의무와 순종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 순종'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율법 자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행하는 것이지만 변질된 율법주의는 이런 사랑보다는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앙은 '죄사함의 방법' 보다는 '죄사함의 열매'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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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똑같은 요나

2019. 8. 25. 15:2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8. 25.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요나 4:1-4

 

 

요나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불순종으로 시작해서 불평을 끝을 맺는 좀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불순종하다가 주일 학교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구원을 받고 이방 도시인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하게 되었다면 전과 후에 어떤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할 터인데 전혀 으겋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기 전과 후가 똑같은 요나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1. 고정관념ㄴ에 물든 요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니느위는 자신의 고국을 괴롭히는 이방나라이기 때문에 불순조하고 도망갑니다, 나중에 어쩔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주 싫어합니다(4:1). 이런 못습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르핌보다는 자기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혀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실용성에 물든 요나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교훈하십니다. 요나가 니느웨보다 박넝쿨을 더 '아낀'(히:'후쓰 = 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 이유는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용성에 물들어 버리면 '이용'하는 것은 잘하지만 '헌힌'ㅎ에는 소극적으로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만 순종과 헌신을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전혀 다른 겁입니다.

3.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런 요나는 바발론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정치적, 사회적, 관습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다니엘이 매국노가 아닌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 떄문이듯, 자신이나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히기ㅏ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성돋ㄹ이 되어야 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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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바벨론

2019. 8. 18. 13: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08. 18.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다니엘 2:17-23

제목 : 주식회사 바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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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시대의 '카이로스'

2019. 8. 11. 15:20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8. 11. 주일 오전예배

마태복음 24:1-3

 

 

감람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이 무너지는 '때'와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4장과 25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복음서의 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며 무슨 뜻일까요? '때'와 '징조'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하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전체를 통해 생각해 봅시다.

1.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의 내용(24:3절, 24:4-31절)
제자들은 '때(크로노스)'와 '징조(세메이온)'에 대해 질문합니다(3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때'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라고 하고(24:36, 42, 25:13), '징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날짜(크로노스)'보다는 '징조'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2. 예수님의 비유의 내용(24:32-25:46)
이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6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6가지 비유의 상황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비유 속의 주인, 신랑, 임금 등이 예고없이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찾아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에 와서 결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시간은?

3.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
결론적으로 '종말의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건 매 순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카이로스'의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카이로스'적인 삶의 대표적인 것이 예배와 기도입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 속의 '카이로스'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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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

2019. 8. 4.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8. 04. 주일 오전예배

에베소서 5:15-17

 

 

성경에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물리적 시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참고, 창1:5과 창1:14).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시간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시간개념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로 표현합니다. 성도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어떤 모습일까요?

1. 세월을 아끼라
오늘 본문은 16절을 중심으로 15절과 17절이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지혜있는 자'(15절)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17절)'가 강조하는 것은 가운데 있는 15절의 '세월을 아끼라'입니다. '세월(카이로스)'과 '때가(헤메라=크로노스)' 댓구를 이루고, '아끼라(엑사고라조)'와 '악하니라(포네로스)'가 댓구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2. 하나님의 시간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로서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입니다(참고, 출3:14). 하나님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호숫물처럼 고여있어 그 물을 떠낼 때 나의 것이 되는 것처럼 '카이로스'는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으로, '지금' ,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만들어집니다.

3. 하나님의 시간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아끼다'는 말은 '엑사고라조'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구속하다' '지불하하고 사다' '게으르지 않다'입니다.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이, '인간의 시간'을 사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흐르는 '인간의 시간' 속에 그냥 두면 악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카이로스'로 만들어버리면 영원(함고, 요17:3)을 소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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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복 받읍시다

2019. 7. 28. 15:0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28.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28:1-6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은 것이 바로 '복'일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복일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기복적이고 무속적인 신앙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는 복을 사모하며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모든 성도에게 주시로 한 복은 무엇일까요?

1.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복'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2절: '베라카')은 동사 '바라크'에서 나온 단어로 '무릎을 꿇다' '찬송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복입니다. 따라서 복이란 모든 범사에서(3-6절의 내용)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굴복하여 순종하며 찬송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2. '행복'이란 하나님의 복을 깨닫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33:29절의 '행복(히: 에쉐르)'은 '아쉐르(바르게 가다, 전진하다)'의 명사형으로 성경적인 복('바라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번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행복입니다(참고, 시편1편).

3.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도 같은 의미일까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도 세상적인 번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마5:1-10).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고 인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이 임하였음을 말하고(빌2:10-11), 예수님 안의 모든 신령한 복은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엡1:3-14).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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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사로잡힌 사람

2019. 7. 21. 14:5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21.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9:28-33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된 사건은 저자는 물론 초대교인들에게 그만큼 큰 감동을 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변화산의 기억 또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세 복음서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기도의 능력이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증명하기 위함일까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등장이 우리의 신앙에 주는 도전을 알아봅시다.

1.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 같은 선지자'를 세우겠다고 하셨고(신18:15),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행3:22-24, 7:37). 그리고 엘리야가 선지자들의 대표격이라고 보면 변화산에 등장한 세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이 선지자들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이 세사람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합니다(신34:6).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고난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참고, 눅9:22-27).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말4:5-6).

3.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은 베드로가 신앙고백 한 후 예수님이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눅9:18-27).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에 감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늘의 사라들은 이 세상의 무관심이나 상황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데 집중하기에 세상 사람들의 평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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