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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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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말씀'에 해당되는 글 708

  1. 2019.12.01 에클레시아의 형통
  2. 2019.11.24 에클레시아의 성숙
  3. 2019.11.17 에클레시아의 성장
  4. 2019.11.10 에클레시아의 감사
  5. 2019.11.03 에클레시아의 사명
  6. 2019.10.27 에클레시아의 길
  7. 2019.10.20 에클레시아의 삶
  8. 2019.10.13 에클레시아의 위기
  9. 2019.10.06 에클레시아의 경제학
  10. 2019.09.29 에클레시아의 능력

에클레시아의 형통

2019. 12. 1. 15:19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2. 01.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여호수아 1:7-9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인 의미의 '부흥'이나 개인적인 의미의 '형통'의 의미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흥'이나 '성공'의 의미와는 많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떠나 시대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중대한 범죄행위에 속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들이 누려야할 '형통'은 어떤 의미일까요?

1. '형통'의 성경적 의미.
성경에서 '부흥'(합3:2, '하야')이란 '살아있다'는 의미이고, '형통'이란 어떻게 사는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형통'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2가지 있는데, '짜라흐'(창24:42, 56; 전진하다, 성취하다, 목적을 이루다)와 '싸칼'(수1:7, 8; 신중하다, 지혜롭다)이란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주어진 상황이나 상태가 크거나 좋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잘 이루고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2. '형통'이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형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5장에는 여리고성 앞에서 하나님의 군대 대장을 만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걸어가는 모든 인생길이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기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깨닫고 발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3. '형통'이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발견'(히: '싸칼')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히: '짜라흐') 헌신을 통하여 형통한 삶을 '사는'(히: '하야')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고('케리그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예배자의 삶이 바로 형통이요, 부흥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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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성숙

2019. 11. 24. 14:0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1. 24. 주일 오전예배

본문 : 골로새서 1:24-29

 

신앙의 성장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에클레시아를 통한 신앙의 성숙은 어떤 모습일까요? 신앙에서 성숙이 의미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신앙의 성숙을 살펴보면서 각자의 신앙의 현주소를 살펴봅시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장을 격려하면서(6절) 자신의 신앙의 삶을 잠깐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1.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의 이꾼이 되는 것입니다(23-27절).
성경에서 '일꾼'(헬: 디아코노스)이란 섬기는 자(마23:11), 하인(요2:5), 사자(롬13:4), 사역자(고전3:5), 집사(딤전3:8) 등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신의 성장을 넘어 다은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2. 신앙의 성숙은 다른 사람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28절 하반절).
가장 의미있는 섬기은 믿음의 사람('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놀랍고도 풍성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27절)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니다. '자기'를 넘어 '너희'에게로 나가야 합니다.

3. 신앙의 성숙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수고합니다(28-29절).
각 사람을 믿음의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전파'(케리그마)해야하고, 그 복음을 자세하게 '가르쳐'(디다케)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믿음의 모범을 보이도록 부단히 '수고'(코피아오)해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수고와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수고가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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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성장

2019. 11. 17.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1. 17.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에베소서 4:15-16

 

'에클레시아'(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합니다(참고, 엡1:22-23, 골1:18). 예수님을 머리로하고 믿는 자들을 그 몸을 이루는 자체로 표현하는 것은 에클레시아가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인데(15절), 교회와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한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요?

1.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15절에 '연결되고'는 머리인 예수님과 연결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기능도 뇌와 연결될 때 건강한 활동이 보장되듯이, 신앙의 성장도 예수님과 긴밀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운것은 예수님과의 '연결됨'을, 교회나 목회자나 어떤 봉사 활동으로 생각하여 이런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거싱 곧 예수님과의 '친밀함'과 '연결'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2. 지체들과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결합되어'란 지체간의 유기적인 관계형성을 의미합니다.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것은 어느 특정부회의 기능만이 활발하게 작동된다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관이 각기 그 기능를 발휘할 때 건강한 강태가 되듯이, 신앙의 건강도 지체를 이루는 각 사람들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 직분과 은사를 주셨습니다(엡4:!1-12).

3. 각자의 기능으로 '역사'해야 합니다.
'분량대로 역사'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보다는, 각자 가진 기능에 맞는 역할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네르게이아)란 단순한 '일이나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통칭하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모든 사역을 의미합니다. 일의 결과보다는 일의 원인과 동기가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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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감사

2019. 11. 10. 15:10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1. 10.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2:13-15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청교도들에 의해 유래한 것이고 성경적인 용어는 '초막절'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감사절의 의미는 미국적인 '추수'에 대한 감사보다는 '초막'에 대한 감사에 있습니다. '초막절'은 추수를 끝내고 40년 광야생활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레23:42-43). 즉 광야의 일상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여전히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1. 하나님의 택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13절 상반절).
'택하다(헬: 하이레오마이)'는 임의적으로 선택했다는 의미보다는 선택하기 위해 심사숙고 했다는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참고, 빌1:22, 히11:25).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을 믿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택하심으로 되었기에 항상 감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해야 합니다(13절 하반절).
구원이 단순히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의 거룩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더라도 본인이 그것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성령과 진리(요4:24)로 예배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조건입니다.

3. 하나님께 쓰임 받음에 감사해야 합니다(14-15절).
바울은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신'분은 '주님'(13절 '주께서')이고 자신들은 그리소도가 영광을 얻도록 쓰임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성도들을 사용하십니다. 크든 작든, 유명하든 그렇지 못하든 모든 성도들을 귀하게 사용하기에 우리는 이렇게 쓰임받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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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사명

2019. 11. 3. 10:32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1. 03.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에스겔 37:24-28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이 곧 바른 신앙인이자 신앙공동체의 모습일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동일하게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신앙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한결같이 목적하신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신앙 공동체('에클레시아')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 이스라엘은 에클레시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28:3, 35:11, 48:4). 이 '민족'을 히브리어로 '카할'이라고 하는데 '회중' '총회' '무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를 기원전 270년 경에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에클레시아'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곧 구약시대의 에클레시아였습니다.

2. 무너진 에클레시아에 주시는 소망이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이 심판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포로 중에 있던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에클레시아로서 회복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다윗 왕' '화평의 언약' '성소' 등은 다시 회복될 신앙공동체를 상징하는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3. 에클레시아의 사명은 이것입니다.
다시 회복될 신앙공동체의 사명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27절)입니다. 37장의 마른 뼈들의 환상이나 40장의 새로 회복될 성전의 환상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는 내용들입니다(6절, 13-14절, 23절). 따라서 에클레시아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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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길

2019. 10. 27. 10:5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27. 주일 오전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9:16-23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로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성경적인 지식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생활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일 수는 없습니다. 개개인이 에클레시아로서, 또한 공동체적인 에클레시아로서 분명히 나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초기 에클레시아인들의 신앙을 들여다보면서 오늘날의 신앙풍토와 각자의 신앙모습을 점검하고 도전받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1. 교회는 복음이다(16-18)
예수님은 '몸은 교회의 머리'(골1:18)로서 교회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하고 묵상하며 삶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교회는 나눔이다
'나눔'이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에클레시아에서 결정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적인 나눔에는 잘못된 신앙지식을 책망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훈계도 포함됩니다.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에클레시아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하는 시간과 물질과 복음의 헌신적인 나눔의 삶이 바로 에클레시아가 가야 할 길입니다.

3. 교회는 사람이다(19-23)
신앙의 근본이 하나님이시기에 교회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적지식을 가르치기위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보면 중세의 '바실리카', 독일의 '키르케', 미국의 '처치(Church)'로 의미가 전달되면서 사람이 아닌 건물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건물은 성도들을 위한 예배처소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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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삶

2019. 10. 20. 15:0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20.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디모데후서 4:6-8

 

 

초기 에클레시아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에클레시아의 많은 교회들은 이름없는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숫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믿음의 길을 걸어간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나온 신앙여정을 회고하는 사도 바울의 회상을 통해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헌신된 삶.
디모데에게 신앙적 교훈을 하다가 6-8절에는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주어가 '내가', '나는'으로 바뀌면서 자신의 헌신된 삶을 '싸우고' '마치고' '지켰으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바울 뿐만 아니라 초기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나라를 세웠습니다.1

2. 하나님의 사명으로 사는 삶
'달려갈 길'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오직 한 길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명으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세례요한의 삶도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끝났음을 말씀하고 있듯이(참고, 행13:25), 에클레시아의 삶은 세상적인 삶보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더 가치있고 의미있게 여겼습니다.

3. 하늘 소망으로 사는 삶.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있지만 하늘 소망으로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의 소망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소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또 다른 믿는 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 에클레시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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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위기

2019. 10. 13. 15:0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13.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6:1-7

 

 

초기 에클레시아는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변의 위협과 박해를 무릅쓰고 오직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가정에서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교회 내부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발생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해결의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1.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항상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위기'라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의 평안'을 더 위험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을 날마다 행하는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곳에는 항상 내외적인 위기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위기를 직면하는 공동체입니다.

2.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복음에 집중하는 기회입니다.
최초로 발생한 교회의 '내적 문제'(1절)를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 말씀, 사역'(2절, 4절)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사실 교회의 위기는 일어난 문제보다 그 문제 때문에 복음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복음전파의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3. 에클레시아의 위기는 결국 은혜의 통로입니다.
에클레시아에서 발생한 위기는 결국 교회의 부흥을 이루는 원인이 되었습니다(7절). 초기 에클레시아는 편안한 환경 속에서 세워지고 성장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기도와 말씀만 붙잡을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곧 하나님이 ㅈ시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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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경제학

2019. 10. 6. 15:10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10. 06. 주일 오전예배

본문 : 사도행전 2:43-47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로 모였습니다. AD 300년까지는 독립된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면 상당한 기간동안 가정교회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어떻게 오랜 기간 동안을 '가정'에서 모든 신앙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경제(Economic)'라는 단어는 '오이코스(집)'와 '노모스(법, 규칙)'의 합성어로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에클레시아의 경제는 무엇일까요?

1. 공유경제(44절).
공유경제란 소수의 사람에 의해 주도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발적인 참여로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경제관입니다. 소유경제는 자본주의를, 분배경제는 사회주의를, 공유경제는 성경적 공동체를 만드는 기틀입니다. 창조의 원리도(창1:28) 소유나 이윤의 극대화라기 보다는 모든 자원을 함께 공유하는 원리입니다.

2. 자족경제(45절).
'자족'이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선의 수고에 대한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참고, 빌4:11-13). 따라서 초기 에클레시아는 박해의 어려운 상황에서 각자 최선의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공동체입니다(참고, 행5:41). 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본보기경제(46절).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로 모이다 보니 가정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모범을 보임으로 가정의 가치를 지켜나가듯, 에클레시아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그 자격을 가정에서의 삶을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삼았습니다(참고, 행6:3, 딤전3장). 이는 에클레시아에서도 가르침뿐만아니라, 삶의 영향력도 그만큼 크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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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의 능력

2019. 9. 29. 14:56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9. 29. 주일 오전예배

본문 : 로마서 1:1-7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그 규모나 인적구성이나 사회적 평가에서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부흥과 세계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기 에클레시아와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생활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절대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1. 복음
에클레시아에서 결정된 사항은 좋든 싫든 모든 공동체가 따라야 할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에 따라 행동했을 때 그 결과가 좋은 것이면 '복된 소식(복음=유앙켈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진정한 복음이며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임을 전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공동체에서나 개인적으로나 모든 사람과 장소에서 담대히 선포되었습니다.

2. 성령
4절의 '성결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의 신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보증입니다. 따라서 초기 에클레시아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한다는 것은 성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일부 잘못된 성령사역자들에 의해 외곡된 성령의 역사를 바르게 회복해야 합니다.

3. 사람
초기 에클레시아는 로마시대의 신분계급이나 사회계층을 떠나 믿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롬16장), 종과상전(딤전6:2), 범되자(몬1:16) 등이 차별없이 동일한 형제자매로 인정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는 '믿는 사람'이 대상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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