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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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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버리고 하늘을 취하라

2019. 7. 14. 14:53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14.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18:15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는 백성들에게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주실 때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가나안 땅이 광야 여정의 목적이 아니라 더 크고 의미있는 목적이 있기에 하나님은 또 다른 선지자를 보내주실 거란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이고, 그 선지자가 추구할 목적은 무엇일까요?

1.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선지자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많은 선지자가 역사에 등장했지만, 신약시대까지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줍니다(요1:21).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 선지자'임을 고백하고(요6:14), 베드로의 설교(행3:22-24), 스데반의 설교(행7:37)에서 예수님이 그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선지자임을 은연중에 입증하셨습니다(눅9:28-31, 35절).

2. 왜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레위지파 출신인 모세는 바로 전에 레위지파에 주어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1-8절). 그런데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바 있습니다(창49:5-7). 모세는 저주받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신33:8-10).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헌신의 삶 때문입니다(출32:26-29, 민25:5-7).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은 그 땅이 주는 '특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얻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처럼 땅을 버리고 하늘을 소유하는 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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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할 가나안은 없다.

2019. 7. 7. 13:41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7. 07.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11:8-12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지상낙원' '축복의 땅' '기회의 땅'이라는 의미일까요? 지금도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연환경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에 좋은 여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은 어떤 의미의 땅이며, 신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땅일까요?

1. 전쟁해야 할 땅입니다(8절).
'차지할 땅'이란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싸워서 빼앗아야 할 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공짜가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세워지는 땅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 영적전쟁의 피빌린내(?) 나는 곳입니다.

2. 하나님만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땅입니다(10-11절).
400여년을 살아서 익숙한 애굽과(10절) 가나안(11절)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사과 골짜기가 있어 비를 흡수하는 땅이기에 애굽이 훨씬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땅입니다(12절).
'돌보다(히: 다라쉬 = 찾다, 구하다, 간구하다)'는 보살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의 눈'과 합쳐져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사람을 찾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 계획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곳입니다.

4. 내가 만들어가야 할 땅입니다(8절, 참고:13절).
가나안에는 '모든 명령을 지켜라'(8절), '하나님을 섬기면'(13절)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계에 저주가 온 것을(창3:18-1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저주를 끊어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롬8:19-22)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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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기도하는 집

2019. 6. 30. 15:1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30. 주일 오전예배

이사야 56:7

 

 

이사야 56장의 내용은 장차 회복될 유다의 신앙을 예언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제사하는 내 집'이라 하지 않고 '기도하는 내 집'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읹디 살펴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입니다. 제사의 기능도 '기도'와 같이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의미하는 '기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한 방편입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유다를 심판하고 새롭게 세워질 성전의 모습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율법처럼 종교적 행위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행하는 것이 우선하는 공동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 기도는 우리 자신들이 성전 도는 것입니다.
'만민(All Nations)'이란 인종과 혈통과 관계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참고, 고전3:16, 엡2:20-22). 우리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전도 마찬가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에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그 뜻을 이루어가는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1일 기도회는 문제해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전 삼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신앙 회복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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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오물과 쓰레기

2019. 6. 23.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23. 주일 오전예배

고린도전서 4:6-13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정작 세상적인 풍요와 화려함을 맛보면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공과 권세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같은 축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 후서를 통해 '자랑'이란 단어를 40회 이상 사용하면서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진정한 자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1. 성도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9-13절)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지적이고, 영적인 은사도 충만하였지만, 오히려 이런 것들을 자랑하다가 여러 분란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에게 전하는 바울 자신의 삶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구경거리요(9절), 세상의 오물과 쓰레기(13절) 같이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삶입니다.

2.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
세상에서 성공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이 주는 기쁨보다는 잃업저리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은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정도로 훌륭한 성품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복음으로 사는 삶은 고난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기쁨과 감사의 삶이 됩니다(참고, 고후4:7-11). 믿음의 고난이 복음을 빛나게 합니다.

3.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비록 환경과 형편은 불신자들에게는 조롱과 비웃음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의미와 자랑은 그러한 삶 속에서도 복음으로 사는 삶의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참고, 고전4:15-16절).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형편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그러한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일부분임을 자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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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믿음

2019. 6. 16. 15:24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16. 주일 오전예배

사무엘상 26:7-12

 

 

'도덕적 믿음'은 그 개념에서 서로 상충하는 듯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믿음'이라면 믿음을 담는 개인적인 그릇이 '인격'이고 인격이 사회성을 가질 때 '도덕'이라고 하고, 도덕이 체계화된 것이 '윤리'입니다. 따라서 도덕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반드시 도덕적인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그릇을 크게 키우길 원합니다.

1. 도덕적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도덕에서 '도'란 삶의 바른 기준을 의미하고, '덕'이란 이런 기준에 합당한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이며 그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행위가 바로 도덕적인 믿음이요 삶이란 의미입니다. 이런 삶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연단'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더덕성을 바꾸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2. 도덕적 믿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에 합당한 도덕, 윤리적 삶을 '덕'이라 하고, 그러한 도덕적인 삶을 '덕을 세운다'(롬15:2)고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는 '오이코도메'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본래의 뜻은 '집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삶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구체적인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3. 도덕적 믿음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의 변화입니다.
다윗이 연단을 통해 자신의 본질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윗은 여전히 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훈련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인식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원수인 사울ㅇ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섬기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사울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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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삽시다

2019. 6. 9. 12:38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09. 주일 오전예배

사사기 6:11-14

 

'믿음으로 행하라' '믿음으로 살아라' '믿음이 좋다?' '믿음이 안 자란다' 등의 표현은 어떤 신앙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믿음이며, 믿음이 좋고 나쁜 것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걸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기드온을 통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1.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기드온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큰 용사'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 너의 힘으로'(14절)는 기드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는 용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생겨야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을 하다 보면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의 선택을 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현실을 불평하고(13절), 확신이 없어 표징을 요구하고(17절),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해야 이해하는(삿7:13-15) 연약한 사람이지만,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기도 쉽겠지만, 작은 것에 순종하다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순종에는 핑계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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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떠나라

2019. 6. 2. 15:07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6. 02. 주일 오전예배

히브리서 11:5-6


 

교회가 신앙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생활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없던 시절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에녹은 성전이나 율법이 없던 시절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입니다(참고, 창5:21-24). 에녹이 보여주는 구원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에녹은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1. 믿음은 '사실'을 '현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아담도 여전히 생존하던 때입니다. 조상들이 경험한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적 '사실'들이 에녹에게는 실제하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실체적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관계는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내러 그는 365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2.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간다'(헬: 프로스에르코마이)는 의미는 '자신을 드리가', '보여주다', '가까이 접근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발걸음에 우리의 발걸음을 맞추어서 목표, 방향, 속도 등을 맞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러내 함께 걷는 것입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은 목적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를 히브리어로 '바카쉬'(시27:8), '솨하르'(시63:1), '다라쉬'(암5:6)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간절히 기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 동행하는 삶을 위해 간절희 사모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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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장면

2019. 5. 26. 15:18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26. 주일 오전예배

신명기 7:6-11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보다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때문에 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니의 특별한 은혜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전적인 은혜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1. 스펙은 없어도 스토리은 있어야 합니다(7-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려한 '스펙'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택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자랑할 거리는 없어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2. 외형이 아니라 맛으로 승부합니다(8절).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볼훔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함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특별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3. 한 사람이 전체를 책임집니다(9-10절).
세상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받는 모습이 곧 세상 사람들이 복 받는 모습이며, 그들의 실패가 세상의 실패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한 민족, 한 가문을 살릴 수 있습니다.

4. 다른 것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11절).
비록 현실은 고단해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삶의 여정을 묵묵히, 그리고 담대하게 살아갈 때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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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

2019. 5. 19. 15:05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19. 주일 오전예배

누가복음 1:13-17


 

예수애교회가 걸어오는지도 어느덧 11년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온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지금까지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걸어가야 할 신앙의 목표를 예수님의 오김을 준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또다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경건(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딤후3:5)에 살면서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 요한을 통해 우리의 가고 있는 믿음의 길을 점검해 봅시다.

1. 거룩함으로 걸어갑니다(15절).
'거룩'이란 어떤 신령한 상태가 아니라 '구별' '다름'이란 의미입니다. '주 앞에 큰 자', '포도주나 독한 술...', '성령 충만함' 등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저인 삶과 '구별'되는 거룩을 의미합니다. 세상 기준이나 인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광야같은 곳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2. 복음으로 살아갑니다(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실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합니다(17절).
교회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이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전하고, 가르치고, 인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아버지의 마음', '거스르는 자를 위인의 슬기'로 사람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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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2019. 5. 12. 15:22 | Posted by 소망지기

 

2019. 05. 12. 주일 오전예배

열왕기상 12:25-33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다윗의 길'이란면,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삶이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참고, 왕상 11:35-38)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는 큰 업적을 행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신앙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1. 사람의 전통을 따랐습니다(25절).
세겜, 부느엘(브니엘) 벧엘, 단, 등의 공통점은 야곱의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날 이름도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이듯, 자신만이 야곱신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알리고 싶어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야곱이 아니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따르는 전통은 자칫 본질에서 벗어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섬겼습니다(26-30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웁니다. 이것은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리함과 사람들에게 인기와 관심있는 것들을 만들어 그들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편리', '유익', '인기'가 하나님의 은혜는 아닙니다.

3.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28절, 31-33절).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모든 예배의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뜻에 따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여기고, 산당을 짓고, 보통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를 정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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