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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김포한강4로 278번길 7-15(석모리 882-2) 교회 031-996-9100 목사님 010-2500-2004 e-mail : jaekimpst@gmail.com 선교후원 : 농협 301-0068-48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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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을 가꾸려면...

2009. 5. 1. 20:3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년에 심은 곰달래 길 벚꽃도 만개했습니다. 여의도 윤중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봄의 전령처럼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의 처마 밑 정원에도 봄의 흔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고 없는 것처럼 보이던 생명이 하나 둘씩 생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습니다. 새 봄에 새로운 각오와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곧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생각이 머무는 정원입니다. 생각은 씨앗이 되어 마음 정원에 심겨집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때를 따라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로 사람의 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13:1-23). 길가는 밖으로 노출된 마음입니다. 지키는 자가 없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돌밭은 은혜를 잊어버린 마음입니다. 바짝 말라붙어 황폐하기 그지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가시떨기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엉켜있어서 두려움과 근심걱정으로 가득 차 복잡하기 한이 없는 곳입니다. 좋은 땅은 준비된 마음이다. 물과 거름으로 경작되어 윤기가 흐르고 떨어진 씨앗이 적당하게 묻혀서 생명의 꿈을 꾸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정원이라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좋은 정원에는 좋은 정원사가 있습니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에 관심을 가지고 그 꽃밭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사람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주고, 필요하면 물을 대고 거름을 줍니다. 비록 지금은 흙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 채워질 정원을 생각하며 정성으로 땅을 가꿉니다. 좋은 정원사는 좋은 씨앗과 상한 씨앗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꽃 피우지 못할 씨앗은 뿌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원사의 눈에 씨앗은 벌써 꽃입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씨앗입니다. 나쁜 생각은 언제나 나쁜 열매를, 좋은 생각은 언제나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내 삶의 결과는 어제 내 생각의 결과입니다. 내일의 내 삶의 모습은 오늘 내 생각의 결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훌륭한 정원사는 사랑과 희망,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많이 뿌려야 합니다. 좋은 생각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 안에는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돌아다니는데 그것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생각을 살피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내면의 소리는 침묵할 때에만 들립니다. 헨리 나우엔은 침묵을 ‘하나님을 향한 귀 기울임’이라고 했습니다. 침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가꾸기 위해서는 내면에 물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좋은 책, 좋은 언어, 좋은 음악도 생각을 다듬어 주는 신선한 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똑같은 화초 두 개를 놓고, 한 쪽 화초에는 좋은 책을 읽어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며, 멋진 음악을 들려주었고, 다른 한 쪽에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책과 말과 음악으로 만져진 화초는 싱싱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웠지만 그렇지 않은 화초는 점점 말라죽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정원입니다. 거기서 좋은 생각이 뿌려지며, 가꿔지고, 성장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해야 할 마음의 정원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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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2009. 4. 21.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동물의 세계>를 보면 수 백 마리의 영양 떼들이 한가로이 초원에서 풀을 뜯다가 한 마리의 맹수의 공격에 그 많은 영양들이 한 걸음에 도망가는 모습을 봅니다. 비행기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 마치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것과 흡사하게 한 마리의 저항도 없이 도망갑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 마다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비록 힘은 약하지만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므로 함께 힘만 모르면 한두 마리 맹수쯤은 충분히 몰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따른 현상일 수 있지만 힘만 모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에도 도망가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철환씨의 「연탄길」에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온 가족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몇 달 병원생활을 해온 할머니가 담당의사로부터 올 겨울을 지내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와서 부모님이 매일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아무도 할머니에게 담당의사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날로 쇄약해지는 자신의 병세로 떠날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씩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그해 겨울을 보내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말한 것보다 4개월을 더 사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야 가족들은 그동안 할머니 앞에서 입었던 겨울옷을 장롱에 넣으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거, 할머니가 정말 몰랐을까?” “모르셨을 거야. 몇 달 동안 마루에도 한 번 못 나오시고 누워만 계셨던 분이 뭘 아셨겠어?” 그해 겨울을 못 넘길 것이라는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드리고 싶어 온 가족은 6월 초여름에도 한 겨울옷을 입고 할머니 방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떤 날은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하고 방에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손을 잡기 전에 차가운 얼음을 만지고 아직도 겨울이라 손이 시리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드렸습니다.’

 

겨울을 넘기기 힘들다는 할머니를 위해 초여름에도 한겨울인 양 온 가족이 겨울옷을 입었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옵니다. 마치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흡사하게, 겨울이 지나기 전에 죽는다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온 가족이 힘을 모아 할머니에게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가족의 사랑이 할머니의 생명을 연장시켰습니다. 죽음 앞에 약해지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가족의 사랑 울타리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할머니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도 복되지만 이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이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가족 앞에서 죽음의 사자도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나 봅니다.

 

한 마리의 맹수 앞에 도망가는 수백 마리의 영양 떼의 모습과 초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죽음과 맞서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함께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위협 앞에 그저 운명이요 팔자라고 치부하며 도망하기에 급급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어둔 그림자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보다 사랑의 행위가 풍성해 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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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도 꽃은 핍니다.

2009. 3. 20. 20:30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황무지 같은 광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 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황무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라고 해서 항상 절망과 낙심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무지에도 오아시스는 있고 꽃들을 피울 수 있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요한 세바스챤 바하’ 일 것입니다. 그는 황무지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무지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결혼하였지만 일곱 자녀를 낳고 바하가 레오폴드 후작과 연주 여행을 떠난 사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바하가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습니다. 다시 결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한 사람도 아니고 열 자녀가 먼저 갔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박약아가 있었습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2월 27일에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작곡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익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인 것을 고백하며 황무지 같은 자신의 인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을 힘입어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 D. 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 N. 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속에서도 봄을 맞이하는 준비의 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비바람은 물론이고 추운 겨울도 이기고 굳어진 대지도 뚫고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광야 같은 환경을 극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느끼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 같고 살 수 없는 땅 같지만 그곳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성숙하고, 아프기 때문에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고, 힘든 시간을 통과했기에 인생을 그 만큼 더 살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는 봄에는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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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박종렬선교사님의 1월 선교 소식!!

2009. 2. 14. 01: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월 선교 소식을 전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올해도 일월이 이렇게 다 지나갔습니다.

 

선교센타 공사를 하느라 현장에서 계속 지내면서 조금이라도 공사비를 절약하려 자재를 사는 것에서부터 작업지시까지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지냈습니다.

이제 지붕공사도 다 끝나고 천장 공사와 변소와 부엌을 만드는 일등을 하고 있습니다.

부엌은 로스마리 학교처럼 한국 부뚜막으로 만들어 연료를 절약하면서도 우갈리를 잘 요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부엌으로는 많은 양의 우갈리를 만들지 못해 주일마다 식사가 모자라 계속 늘어나는 교인들에게 미안하였는데 부엌이 완성되는 대로 제대로 식사를 대접하려합니다.

오전에 주일학교를 마치고 어린이들은 식사를 먼저 하게 되는데 어른 예배를 마친 후에도 다시 와서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요즘 워낙 집에서 먹을 것이 없어 어느 곳에서든지 먹을 것이 있으면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힘을 다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케냐에서도 양식 값이 많이 올라 서민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로스마리 학교와 마사이 학교들에 공급하는 점심급식이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배가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인수가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9월부터 같이 사역을 하고 있는 Mbugua 목사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청소년들과 장년들의 수가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은 주일학교와 장년수가 비슷하게 늘어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어린이 150명 장년 150명 정도 출석하였는데 금년 목표를 어린이 장년 각각 250명으로 잡았는데 너무 적게 잡은 것을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번 주부터는 매주 수요일을 전도하는 날로 정하여 저도 같이 나가 부지런히 전도를 하려고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봉급인상을 요구하며 두주를 수업을 중단하여 학생들이 수업을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내일부터 수업이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두주동안 학교에서 점심급식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동안 Dominic 목사는 정부기관에 제출할 서류 등을 정리하면서 저의 일을 도와주었고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어 기도하였는데 이번에 임신이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이시키리아와 올로이카 두 마을에도 사역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이시키리아의 고장 난 펌프가 수리되어 가뭄이 심한 요즘에도 물이 잘 나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방문하였는데 가뭄으로 양식이 없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올로이카에 솔라펌프를 설치하였더니 아무 문제없이 잘 사용하고 있어 역시 투자를 많이 하면 편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선교센타 공사가 끝나면 마이시키리아 교실 두칸과 올로이카 학교 바닥 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고등학교 학생을 후원하는 사역이 점점 중요한 사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46명이 되었는데 앞으로 100명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신석교회와 성석교회가 중심이 되어 도저히 상급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못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의 손길을 펴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달 19일에 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3월에 아내의 검진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수술후 이번이 세 번째인데 좋은 결과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줄 믿습니다.

 

늘 기도와 물질로 섬겨주시는 김목사님들의 귀한 섬김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연락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2009년 2월 1일

 



케냐에서 박종렬선교사 드림
254 738 171 626
p.o.box 824 Village Market Nairobi 00621 Kenya
http//: kenyaro.org/

마지막도 처음처럼...

2008. 11. 27. 20:29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의미지요. 시작도 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작은 반이지만 마지막은 전부다.’는 말을 즐겨합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 하였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좋은 시작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범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렇습니다. 처음 만남의 순간도 좋아야 하지만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마지막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간에도 헤어질 때는 첫 사랑의 기억보다는 마지막 헤어질 때의 기억이 더 오래 가지요. 또한 안 좋은 기억이 더 오래 갑니다.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잘못된 기억을 좋은 기억보다 더 오래 간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도 만들어야 하지만 헤어질 때도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월 보다는 12월이 더 중요하고, 봄보다는 겨울이 더 중요하고, 청춘의 때보다 황혼의 때가 더 중요합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것은 4구체로 된 신라의 향가(鄕歌)인 ‘헌화가(獻花歌)’입니다. 신라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관을 감상하다가 절벽위에 한 송이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순정공의 부인인 수로부인이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이에 그의 종자(從者)들은,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老翁)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며 노래를 지어서 부른 것이 이 헌화가입니다. 이 노래의 제1행을 제4행에 연결하여 읽으면 내용 이해가 쉽습니다.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면, 붉은 바위 끝에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비록 소를 모는 나이든 노인이지만 젊은이들도 감당치 못할 일을 행하는 노옹의 용기가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힘없는 노인이지만 그의 정신은 젊은이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젊은 기상이 가득합니다. 청년 못지않은 당당한 노년을 살고 있습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시간은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로 내일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물이 도랑을 타고 흐르듯이 시간도 준비하고 계획하는 대로 흐릅니다. 흐르는 세월도 디자인해야 합니다. 시간도 설계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시작만 잘 준비하지 말고 마지막도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새해가 되면 저마다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마지막 또한 철저한 준비를 가지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어질 때도 만날 때처럼... 마지막도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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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사는 지혜

2008. 11. 27. 20:28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본의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20세의 주인공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별, 죽음, 그리고 사랑을 통해 고민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상실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많은 상실의 아픔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입사에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남의 기쁨이 있는가하면 헤어짐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죽음, 질병, 파산..., 그래서 기쁨의 저편에는 아픔이 항상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항상 기쁜 일만 생길 수 없고, 또한 항상 슬픈 일만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삶에도 ‘희비(喜悲)균등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보다 알찬 삶을 살기위해서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그냥 있어도 되겠지만, 불행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의 약점을 잘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도 수많은 명곡을 썼습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장님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는 오하이오 주 감옥에 갇히기까지 인생이 추락했다가 비로소 자신에게 잠재해있는 천재적인 재능을 깨닫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상표를 붙이는 가난한 기능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쓰라린 실연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삶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천천히 삶을 음미해보면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국을 만들려면 서두르지 않고 오래 끊여야 합니다. 물론 빌 게이츠는 그의 책 <생각의 속도>에서 이 시대는 속도가 경쟁력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속도는 내는 이유는 바로 ‘느림’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여유’가 없는 ‘속도’는 조급증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며 살지 마십시오. 창조자는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유명인과 같은 옷과 헤어스타일을 한다해도 내가 유명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나’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가 곧 나의 가치임을 인식하십시오. 오히려 그 ‘다름’을 즐기십시오. 획일화를 주는 규격과 틀은 과감하게 깨야합니다. 그리고 남 따라 가려고 애쓰지 말고 애써 시대를 좇지도 마십시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우리 각자는 살아갈 각각의 길이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의 근간이 ‘음양오행설’입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타락하거나 썩습니다. 변화는 새로운 감각과 용기가 결합될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변화하려면 새로운 것과 부딪치려는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삶의 변화는 외형의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성숙’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내면의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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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5. 20:2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여성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크기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비쌉니다. 그 비싼 화장품을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넓은(?) 얼굴에 날마다 바르는 것을 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굳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은 여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신을 가꾸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때 삶 속에서도 의욕이 일어나는 가 봅니다.


윤미라씨가 쓴 ‘그릇을 닦으며’ 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머니// 뚝배기의 속 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주세요.


사람들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모습을 가꾸기 위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며 자신의 앞모습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심지어 앞모습을 더 잘 꾸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설거지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설거지를 해 놓고 보니 그릇의 뒤가 다른 그릇의 앞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어쩌면 사람의 관계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일보다는 나의 뒤와 너의 앞이 서로 포개져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누군가가 다시 찾아오고, 네가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그래서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릇의 안은 우리 마음이요, 그릇의 뒤는 우리의 생활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의 안쪽(마음)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 뒤쪽(생활)이 더러우면, 그 그릇(사람)은 제대로 닦여졌다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릇의 뒤쪽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의 안을 닦지 않았다면, 그 그릇은 온전히 닦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릇의 안과 밖은 하나요, 사람의 마음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 존재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퍼즐처럼 저마다의 색깔과 모양으로 한껏 어우러진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릇의 안과 밖, 내 앞모습과 뒷모습, 내 마음과 생활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만족스런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외적인 것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살아 왔습니다.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우리의 뒷모습입니다. 잠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고 가릴 수 있겠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보이는 앞모습과 함께 보이지 않는 뒷모습도 까지도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모습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우리의 떠난 자리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릇을 닦는 마음으로 우리의 뒷모습도 앞모습처럼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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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의 30초가 30년을 바꾼다.

2008. 8. 27. 20:25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하루의 기분은 그날 아침에 무슨 말을 듣고 시작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칭찬과 반가운 인사의 말을 들었으면 하루가 즐겁고,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하루 내내 기분이 언짢은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비단 하루의 일과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도 우연히 들은 한 마디의 말에 큰 변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토마스 호빙(Thomas Hoving)이란 사람은 예술품을 감정하는 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던 사람입니다.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낙제하여 퇴학당할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어느 과목에서도 흥미를 못 느껴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학교에서 쫒겨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각과를 택하여 보기로 했습니다. 미술과목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는데도 단지 퇴학 직전의 마지막 기회를 살려보려고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첫 강의시간에 교수가 한 조각품을 들고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이것이 무슨 작품이며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술과 학생들은 각자가 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대답했는데 드디어 호빙이 대답할 차례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술품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서는 솔직하게 생각 나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너무 매끈하여 무슨 기계 같습니다. 특정한 용도가 있어 보입니다." 이 대답이 호빙의 생애의 극적인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던 물건은 단순히 산부인과에서 사용하는 기계 중의 하나였습니다. 느껴지는 대로 대답한 것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크게 인정 받게되자 호빙은 전공을 미술로 바꾸고 후에 성공한 예술품 감정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예술품의 감정에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한번 크게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를 교육심리학에서는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라고 부릅니다.


누구든 자신의 능력이 인정되면 자기 자신도 자기를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감이 있어지게 됩니다.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격려의 말의 듣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한 학생의 고백은 부모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하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90점을 받으면 왜 100점을 못 받아 오느냐고 꾸중 듣습니다. 80점을 받으면 더 야단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결국은 자식에 대하여 인정하기에 인색하였던 그의 부모가 그 병의 원인이 된 셈입니다. 비록 자녀가 100점을 못 받았더라도 그의 노력만큼은 인정해 주었더라도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에 지금도 ‘호빙이펙트’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30초의 칭찬이 남은 30년을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면 칭찬하고 격려하기에 인색하지 맙시다. 우리 주변인의 성공과 행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비난과 비평보다는 이해와 격려가 행복한 삶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단 한 과목에서만 '양'을 받고 나머지 전 과목에 '가'를 받은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무 한 과목에만 집중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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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의 행복

2008. 8. 6. 20:16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하잘 것 없는 강아지똥이 어느 날 거름이 되어 별빛과도 같은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다시 피어나기까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는 권정생님이 쓴 <강아지똥>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어쩌면 며칠 전에 제 가슴 속에 심은 별의 씨앗이 싹 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떻게 그런 꽃을 피울 수 있니?"

  물어 놓고 얼른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비를 내리시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시기 때문이야."

  민들레는 예사로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역시 그럴 거야. 나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을라고·····.'

  금방 강아지똥의 얼굴이 또 슬프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러자 민들레 싹이,

  "그리고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하고는 강아지똥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

  "네가 거름이 되어 줘야 한단다."

  강아지똥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예쁜 꽃을 피

  게 하는 것은 바로 너란 말이야."


  강아지똥은 가슴이 울렁거려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과연 나는 별이 될 수 있구나!'

  그러고는 벅차 오르는 기쁨에 그만 민들레 싹을 꼬옥 껴안아 버렸습니다.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


  비는 사흘 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강아지 똥은 온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습니다. 땅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가 민들레의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줄기를 따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샛노랗게 햇빛을 받고 별처럼 반짝이었습니다.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민들레꽃은 보잘것없이 보이는 강아지똥의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께”에 의해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잘난 꽃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볼품없고 냄새나는 강아지똥에 의해 더 기름져 갑니다. 기억합시다. “세상의 쓸모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나의 존재가 이 세상을 더 기름지게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어도 내가 낮아지고 녹아져 세상에 스며들 때 새로운 아름다움이 창조된다는 것을... 우리에게도 강아지똥의 행복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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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2008. 8. 6. 09:22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세상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저마다 눈앞이 캄캄하여 그만 풀썩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간이면 누구나 아무도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뇌를 안고 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기에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물이 그 종착지인 바다에 이르게 되기까지 때로는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소용돌이도 만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수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서정시인 김재진은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고 인생의 아픔을 시로 표현했던 모양입니다.


별에서는 소리가 난다

산 냄새나는 숲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바람 소리

견디기 힘든 마음 세워 밤하늘 보면

쨍그랑 소리내며 세월이 간다.


때로 아플 때는 아프다고 소리치고 나면 속이 후련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 때면 아무나 붙잡고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나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크게 소리 한 번 지르고 나면 조금은 덜 억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8월의 짙은 녹음이 지난 겨울에 앙상했던 나뭇가지를 가리듯 우리의 아픔도 세월이 잊게 합니다. 지내놓고 보면 먹구름 뒤에 항상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 그저 막막할 때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됩니다. 결국 인생살이라는 것도 고통 안에 조차 기쁨이 숨겨 있고 즐거움 가운데도 고통이 함께함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이래서 생긴 것이겠죠. 이것이 인생살이의 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닌 시련과 좌절, 고난과 역경마저도 삶의 한 단면이 되어 생의 의미를 부각시켜 주고 있다고 봅니다.


<꿈꾸는 자가 알아야할 21가지 믿음의 법칙>이란 책에서 저자는 “아픔을 당신 인생의 전환점으로 만드십시오. 미래를 창조하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고통을 변화의 도구로 삼으십시오. 고통과 절망을 소원이라는 그릇에 담으십시오. 원한 맺힌 소원을 기도로 승화시키십시오. 당신의 기도를 전능하신 주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가슴 아픈 소리가 변하여 당신의 입술에서 환희에 찬 감사의 노래가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한번 태어난 세상은 싫으나 좋으나 예외 없이 걸어가야 할 힘든 길입니다. 그렇기에 자칫하면 좌절하기 쉽고 무엇인가 탓하며 불평하기 쉬운 것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무엇하나 나아질 인생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 내린 것이 이왕 사는 인생 긍정적으로 ‘기쁘게’ 살아 보자는 생각입니다. 살아가면서 가끔씩 밤하늘의 별들과 푸른 하늘, 노래하는 새들과 반기는 들꽃들,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지나가는 이웃들을 바라봅시다. 심지어 발 밑의 아스팔트길 틈 사이에서 용트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풀포기에서 생명의 신비를 볼 수만 있다면 제 아무리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는 인생길에 희망의 꽃씨를 뿌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8월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푸르름을 더해가는 8월의 녹음처럼 우리의 삶에도 희망이 짙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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